[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오늘(1920년 6월 25일)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천도교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했습니다. 《개벽》이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의 어두운 세계는 끝나고 후천의 밝은 문명세계가 돌아온다.”라는 뜻의 ‘후천개벽’에서 따온 것입니다. 창간 취지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ㆍ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개벽》의 기사들을 보면 종교ㆍ사상은 물론 정치ㆍ경제ㆍㆍ역사ㆍ천문ㆍ지리ㆍ문학ㆍ미술ㆍ음악ㆍ기술ㆍ풍속ㆍ인물 등을 아우르는 종합지적인 성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개벽》은 창간호부터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ㆍ’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지요.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지만,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하였으며, 그 뒤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호곡장(好哭場)]”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요동벌판 하늘과 땅 사이에 뚝 트인 경계를 보고 외친 말입니다. 연암은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을 따라 지금으로부터 241년 전인 1780년(정조 4)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 시작해 요동,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을 거쳐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에 이르는 6달 동안의 여정 속에 열하(熱河)의 문인들,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열하일기》를 현대어로 뒤쳐서(번역) 책을 펴낸이들은 한결같이 '세계 으뜸 여행기'라는 훈장을 달아주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행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라남도 나주시 국립나주박물관에 가면 전체 높이 3.27m, 간석 높이 0.83m, 지대석 너비 1.44m 크기의 보물 제364호 나주 서성문 안 석등(石燈)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본래 전라남도 나주읍 서문안에 있던 것을 1929년 경복궁으로 옮겨놓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건되어 보관되던 중 2017년 해체, 보존처리를 거쳐 고향인 국립나주박물관으로 돌아가 전시돼 있습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지요. 네모난 모양의 널찍한 바닥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8각이고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둥모양의 중간받침은 8면으로 면마다 테를 둘러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 안에 한 줄씩의 문장을 새겼는데. 윗받침돌은 8각면에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조각했고, 화사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창이 4개입니다. 지붕돌은 매우 장식적으로 8개 면마다 처마 끝에 짧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세로줄무늬가 있고, 그 위로 막 피어오르는 형상의 꽃장식이 두툼하게 달려 있으며, 지붕돌 위로는 마치 지붕을 축소해 놓은 듯한 돌이 올려져 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막걸리 빚기’를 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번 지정 대상은 막걸리를 빚는 작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생업과 의례, 경조사 활동 등에서 나누는 전통 생활관습까지를 포괄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쌀 막걸리는 쌀을 깨끗이 씻어 고두밥을 지어 식힌 뒤, 누룩과 물을 넣고 여러 날 동안 발효시켜 체에 거르는 과정을 통해 빚지요. 막걸리의 ‘막’은 ‘바로 지금’, ‘바로 그때’와 ‘걸리’는 ‘거르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순우리말일 뿐만 아니라 이름 자체에서도 술을 만드는 방식과 그 특징이 드러나 있습니 막걸리는 멥쌀, 찹쌀, 보리쌀 등 곡류로 빚기 때문에 삼국 시대 이전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막걸리는 물과 쌀, 누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요.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농사꾼들 사이에서는 “같은 품삯을 받더라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로 일하러 간다.”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는 농민의 땀과 갈증을 해소하는 농주(農酒)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도롱이 접사리며 삿갓은 몇 벌인고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 가지 모 고추 모는 아기 딸이 하려니와 맨드라미 봉선화는 내 사천 너무 마라 아기 어멈 방아 찧어 들 바라지 점심 하소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 위는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가운데 5월령 일부로 이 음력 오월 망종ㆍ하지 무렵 농촌 정경을 맛깔스럽게 묘사했습니다.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라며 모내기에 바쁜 모습을 그려내고,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라며 맛있는 점심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째 “하지”입니다. 이 무렵 해가 가장 북쪽에 있는데, 그 위치를 하지점(夏至點)이라 합니다.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 14시간 35분이나 되지요. 한해 가운데 해가 가장 오래 떠 있어서 지구 북반구의 땅은 해의 열을 가장 많이 받아 이때부터 날이 몹시 더워집니다. 그런데 하지는 양기가 가장 성한 날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 을 - 백성일 서녘 하늘 붉게 이글거리는 노을 아무도 모르게 한 바가지 퍼담아 늦은 저녁나절 울타리 물주는 내님 손톱을 슬쩍 담갔더니 봉숭아 꽃물 붉게 물들었네 우리 겨레의 풍속 가운데 입하와 소만 무렵에 있었던 것으로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있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계집애들과 어린애들이 봉숭아를 따다가 백반에 섞어 짓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인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봉숭아꽃이 피면 꽃과 잎을 섞어 찧은 다음 백반과 소금을 넣어 이것을 손톱에 얹고 호박잎, 피마자잎 또는 헝겊으로 감아 손톱에 붉은 물을 들인다. 이 풍속은 붉은색이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요즈음도 소만 무렵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첫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노을에 대해 조병화 시인은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고’라고 했고, 김규동 시인은 ‘노을은 신이 나서 붉은 물감을 함부로 칠하며 북을 치고 농부들같이 춤을 춘다’라고 했으며, 김광균 시인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젯밤 KBS 뉴스에는 “쿠팡 이천물류센터서 큰불, 소방관 1명 중상ㆍ1명 고립”이라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인력 360여 명과 장비 120여 대가 대거 투입됐지만, 불길은 오히려 건물 전체로 계속 번지고 있다는 소식도 이어졌지요. 그런데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이날 점심때 크게 불이 나 경시서(京市署, 시전을 관리했던 관아) 및 북쪽의 행랑 1백 16간과 인가 2,170채가 불에 탔으며, 인명 피해는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인데, 어린아이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처참한 기록이 보입니다. 이에 세종임금은 종루 옆에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고 집과 집 사이에 방화담을 쌓았으며, 초가지붕은 기와지붕으로 고친 것은 물론, 곳곳에 우물을 파서 방화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넉 달 뒤엔 금화도감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고쳤는데, 이후 성종 12년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뜻의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소방대원이 있었는데 정원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이 연적은 높이 9.8㎝, 몸통 지름 6.0㎝의 크기인데 어미원숭이가 앉아서 새끼원숭이를 안아주려고 하는데 새끼원숭이가 두 손으로 밀어내는 해학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연적입니다. 연적 모양을 보면 어미원숭이의 머리에는 물을 넣는 구멍이, 새끼의 머리에는 물을 따라내는 구멍이 뚫려 있지요. 그리고 어미원숭이의 눈ㆍ코ㆍ입과 새끼원숭이의 눈에는 짙은 철사(鐵砂) 물감으로 점을 찍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닥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耐火土)로 눈을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으며, 바탕흙은 맑고 푸른 잿물로 전면에 곱게 발라 은은한 광택이 나타납니다. 12세기 중반 무렵 순청자(純靑磁)의 전성기에는 오리ㆍ복숭아ㆍ거북ㆍ동자 등의 소형 연적이 적지 않게 제작되었는데, 이 모자원숭이모양 연적도 그러한 연적 중의 하나지요. 청자 소품 도자기 가운데는 국보 제74호 청자압형수적(靑瓷鴨形水滴)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 명품입니다. 그런데 이 연적에는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 도쿄의 영국인 변호사 개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새집에 가서 잠이나 잘 잤느냐. 병풍을 보내니 몸조리 잘하고 밥에 나물을 넣어 먹어라.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이는 조선 제18대 현종 임금이 사랑하는 고명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입니다. 현종에게는 외아들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의 세 공주가 있었는데 두 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는 유달리 막내 명안공주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현종뿐만이 아니라 어머니 명성왕후와 오라버니 숙종도 명안공주를 몹시 아꼈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한글편지에서 그 오붓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ㆍ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공주의 예대로 시급하게 마련하여 실어 보내고, 갖가지 상사(喪事)에 쓰는 것을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몸소 친히 진배(進排)하여 미진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이는 《숙종실록》 13년(1687) 기록으로 오라버니 숙종은 명안공주가 23살의 나이로 죽자 소복 차림으로 식음을 전폐했을 만큼 슬퍼하였습니다. 이들 가족 곧, 명안공주가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 오라버니 숙종과 주고받은 한글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3대 풍속화가 가운데 신윤복의 풍속화 국보 제135호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에는 남녀의 선정적인 장면, 곧 양반ㆍ한량의 외도에 가까운 풍류와 남녀 사이의 애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는데 이 '혜원풍속도첩‘은 <연당야유(蓮塘野遊)>, <단오풍정(端午風情)>, <월하정인(月下情人)>, <기방무사(妓房無事)>, <청루소일(靑樓消日)> 등 모두 30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가운데 ‘월하정인(月下情人)’이란 그림은 늦은 밤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즐기는 한 쌍의 남녀를 그렸지요. 넓은 갓에 벼슬하지 못한 선비가 입던 겉옷인 중치막을 입은 사내와 부녀자가 나들이할 때, 머리와 몸 윗부분을 가리어 쓰던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초승달 아래서 은밀하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림 가운데 담벼락 한쪽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쓰였습니다. 당연히 정인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담장 위로 보이는 초승달이 뒤집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