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개화기에 들어오면서 선각자들은 구국운동으로 우리글을 살려 발전시키려 하였습니다. 유길준은 1895년 《서유견문》에서 역사상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언문이 일치하는 문장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듬해 서재필은 처음 띄어쓰기까지 하는 순 한글로 된 <독닙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띄어쓰기는 전번 이야기의 헐버트가 자신이 저술한 《사민필지》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는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주시경과 상의해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지석영, 이익로, 최남선 등 많은 선각자가 한글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 가운데 대표로 주시경 선생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시경은 한마디 말로 450년 동안이나 묻히다시피 하여있던 훈민정음을 다시 발굴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람입니다. 주시경은 1876년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11살에 사업가 백부의 양자로 가서 글방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6살 때 한문을 국문으로 해석하면서 한국어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껴 18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만국지지 특별과를 거쳐 보통과에 입학해 영어문범을 연구하게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저번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훈민정음은 반포 58년 뒤 연산군 때 (1504년) 지하로 쫓겨 들어가 20 여 년을 지내고서 중종조의 어문학자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한자 학습의 보조역할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훈몽자회는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만든 교재였는데 한자의 음과 훈을 언문으로 써 주었던 것이지요. 최세진은 언문을 모르는 사람은 배워서 쓰라고 범례를 만들어 훈민정음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여기서 기역, 니은 등 자모의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훈민정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으므로 이 범례야말로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한 동안 언문 공부의 유일한 교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언문은 편지나 일기를 쓴다든지 혹은 언문 소설을 읽는다든지 하여 민간사회로 깊숙이 번져나갔으며 궁궐에서도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흔히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습니다. 이렇게 언문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선조는 언문교지를 써서 길거리에 내붙였습니다. 이후에도 숙종의 계비였으며, 경종의 대비였던 인원왕후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고 아버지 김주신과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1446년 9월 10일 훈민정음을 반포하자마자 세종대왕은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합니다. 10월 10일에는 신하들의 죄목을 직접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냈으며 다른 궁내 공문을 언문으로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사용을 널리 알렸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과거시험에 언문을 포함하도록 하여 훈민정음을 모르면 출세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문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언문은 훈민정음을 비하하여 쓰던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쓰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은 첫째 아들 문종과 둘째 수양대군, 그리고 정의공주를 훈민정음 창제 과제에 깊이 참여시켜 훈민정음이 자연스럽게 후대로 넘어가도록 포석을 깔아 두었습니다. 창제 후인 1444년에는 신숙주 등에게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는데 두 왕자를 감독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1446년에 세종비 소헌왕후가 죽자 수양에게 《석보상절》을 짓도록 하고 1449년에는 이 책을 바탕으로 손수 500여 수의 노래를 지어 《월인천강지곡》이란 책을 냈습니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뽑아 언문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훈민정음은 성리학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필자는 부끄럽게도 그간 공학도라는 핑계로 성리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크게 관심 두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중고교 국어 시간에 제대로 배웠으면 기억이라도 날 텐데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그저 하는 소리이겠지, 당시 학자들은 모두 성리학에 빠져 있었으니 뭐든 성리학과 연관 지었겠지, 더구나 중국이 우리 고유의 문자를 만드는데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것을 걱정해 성리학을 내세웠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독자들께서는 제대로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다 잘 아신다면 필자를 꾸짖어 주시고 혹시 그렇지 못하시다면 이 글을 읽으며 같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틀린 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꼭 제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함께 토론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십시다. 훈민정음 예의편 제자해(制字解)에 보면 ‘천지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과 오행뿐이니. (가운뎃줄임) 사람의 말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 못할 따름이다. 이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훈민정음》 해례의 서문은 세종대왕이 직접 쓰신 글이라 합니다. 그 첫 문장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通”은 언해본에 “나랏 말쌈이 중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지 아니할 쌔”로 뒤펴(번역) 있습니다. 이는 600년 전 말이니 현대어로 옮기면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슬옹 교수는 그의 책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2010, 지식산업사)》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30여 편의 논문과 책은 서문을 구절별로 나누어 비교 분석하였는데 이 부분의 해석은 모두 비슷하며 교과서에도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로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하므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역 시안으로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를 제시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첫째, 서로 통하지 못한다는 대상이 누구일까요? 예문을 들어 판단해 보겠습니다. 1) 너의 옷 색깔은 나와 달라 들어가지 못한다. (나와 옷 색깔이 같은 사람만 들어간다) 2) 네 것은 나와 달라 바꿔 줄 수 없다. (내 것과 같은 것만 바꿔준다)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임금 때의 일을 기록한 《세종실록》의 분량은 전체 조선왕조실록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현재 400쪽짜리 40권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세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업적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는 다른 모든 일을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해석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온갖 환난을 이기고 세계 유수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세종대왕이 닦아 놓은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글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끌어갈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이 위대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전번 네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1만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면서 우리 말을 가꾸고 이를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을 들였는지를 엿보았습니다. 이 염원은 세종대왕으로 이어져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알지도 못하는 법을 어겨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세종대왕은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1418년 22살의 나이로 즉위한 세종은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우리는 매일 한글의 덕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참 좋은 글자구나 하고 느끼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큽니다. 그러나 혹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한글을 누가 어떻게 해서 만들었는지, 글자로서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소리를 표기하는 원리는 무엇인지 등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서문을 쓴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있어 이런 문제가 없는데 한글에 관해서는 마땅한 책도 없습니다. 앞에서 인류가 5,500년 동안 문자를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를 보았는데 이 글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어떤 문자생활을 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훌륭한 훈민정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2만 년 전에 정점을 찍고 그 뒤 1만 년 동안 온도가 차차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인류는 해를 쫓아 따뜻한 동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북쪽의 중앙아시아와 남쪽의 인도 남부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1만 년이 넘는 이 긴 세월을 더 이상 큰 이동 없이 한반도와 인근에서 농사나 수렵으로 살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어 살아 온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앞에서 훈민정음은 인간의 말소리를 가장 정확히 그리고 가장 쉽게 표기할 수 있는 글자라 하였습니다. 문자의 목적이 말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훈민정음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문자 발전과정의 끝판왕이라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라틴 알파벳은 소리를 적을 수가 없고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한자는 상형문자의 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세 번째로 많이 쓰이는 아랍문자는 상형문자에서 겨우 한 단계를 발전한 미숙한 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문자인 데바나가리는 소리를 적지만 여러모로 훈민정음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훈민정음 같은 문자를 만들기 위해 오늘날까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그 얼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시 인류가 힘도 약하고 재빠르지도 못했지만 맹수들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돌도끼나 활 같은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랍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물건을 만들 때 여럿이 의견을 모아야 했으며 결국 말을 필요로 했다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토마스 몰간 교수는 이러한 논리로 인류는 2백만 년 전부터 일종의 말을 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첫 번째 이야기에서 한글은 직접 소리를 적는 글이고 알파벳은 단어를 만들어야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하철로 비유하자면 한 번 갈아타야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한자는 갈아타는 문제는 없지만, 정거장까지 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한자도 발음이 있어 소리를 표현하지만, 글자 자체가 뜻을 갖는다는 것이 다른 글자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한자는 뜻글이라 하고 한글이나 알파벳은 소리글이라 분류합니다. 한글을 소리글이라 하여 알파벳과 한 부류로 보는 것은 한글을 제대로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유명한 언어학자 영국 써섹스 대학의 쌤슨교수는 한글을 제대로 배웠나 봅니다. 그는 한글을 ‘자질문자(featural character)’라고 하여 따로 분류하였습니다. 1944년생이니 최근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나 이 주장은 이미 널리 받아들여져 이제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자질(資質)’이라는 말도 그렇고 ‘featural’ 이라는 말도 그렇고 언뜻 와 닿지 않는 어휘입니다. 명사형인 feature는 사전에서 특징이나 특성이라고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앞으로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어싣기(연재)하려 하는 신부용입니다. 왜 한글이야기를 하면서 공학박사를 내세우냐고 하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토목공학과를 나와 캐나다에 가서 교통공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습니다. 80년 말에 KIST에 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교통연구원을 만들고 원장을 지냈습니다. 당연히 한글이나 언어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중고등학교 국어교실에서 배운 것, 그리고 궁금한 점을 인터넷 검색이나 공개 세미나에 가서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상식 수준을 넘지 못하겠지만 제 한글이야기는 강단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분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을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토론을 유도하여 함께 해답에 도달하도록 해 볼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해답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소득도 중요하리라 기대합니다. (글쓴이 말)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과연 한글이 세계 으뜸 문자인지입니다. 누구든 한글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서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