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당고개역에서 수락산 유원지를 가다보면 덕능고개를 넘고 다시 순화궁 넘습니다. 전에 순화궁 고개를 넘으면서 왜 고개 이름이 순화궁 고개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궁호로, 인사동 태화빌딩 앞에 가면 순화궁 터라는 표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순화궁은 매국노 이완용의 손에 넘어갔다가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인수하여 태화관으로 고쳤었죠. 이 태화관에서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구요. 그런데 그 순화궁과 이 순화궁 고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더군요. 그런데 지도를 보다보니 순화궁 고개 옆에 순화군 묘가 있었습니다. 순화군이라면 선조의 6째 아들 아닙니까? 임진왜란 때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함경도로 갔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순화군말입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순화군 묘가 있어 순화군 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순화궁 고개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애 있는 조선 선조 6번째 왕자 순화군(順和君,?~1607) 무덤 순화군은 완전 개망나니입니다. 아니 연쇄살인범입니다. 무슨 말인고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딜쿠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 등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딜쿠샤 얘기를 하니, 좀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번에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 89 언덕 위에 있는 딜쿠샤라는 집을 찾아보고 왔습니다. 하하! 이렇게 말씀드리면, 행촌동에 그런 집이 있냐고 더 의아해 하실 것 같네요. 딜쿠샤는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가 1923년에 지은 집으로, 화강석 기저부 위에 붉은 벽돌을 세워 쌓은 2층 주택입니다. 안내문에는 이런 건축기법을 프랑스식 쌓기라고 적어놓았는데, 하여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벽돌 양식의 집이었다 할 것입니다. 1923년에 미국인이 조선 땅에 이런 희귀한 집을 지었다는 것, 게다가 집 이름이 ‘딜쿠샤’라는 힌두어 이름이라는 것이 저를 딜쿠샤로 끌어당겼습니다. 알버트는 왜 조선에 집을 지으면서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딜쿠샤는 알버트의 부인 메리 테일러가 결혼 전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서 본 고성의 이름이랍니다. 메리는 ‘딜쿠샤’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결혼하면 자기가 살 집의 이름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차일혁 총경 얘기를 하였지요? 차일혁 총경 이야기를 하다 보니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각납니다.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두류봉으로 내려가다 왼쪽 지능선을 타고 내려간 산자락에 있는 벽송사 뒷산 선녀굴에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은거하였었죠. 정순덕은 다른 빨치산 대원 이은조, 이홍이와 이 굴에 은신하다가 1962년 2월 발각되어 도주합니다. 그러나 고향인 인근 산청군 내원골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1963월 11월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습니다. 나중에 총상을 입은 다리는 잘라냈고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최후의 빨치산이 1950년대도 아닌 1963월 11일에까지 있었다는 것과 그것도 최후의 빨치산이 여자라는 것에 놀라실 것입니다. 사실 정순덕은 처음부터 빨치산은 아니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찾아내라는 토벌대의 고문에 못 이겨 남편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도 죽고 대부분의 빨치산이 사살되면서 최후의 빨치산이 된 것이지요. 정순덕은 자신이 산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를 이렇게 얘기하지요. 고문이 한두 번으로 끝났던 게 아니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라며 참나무 몽둥이로 무차별 타격을 가하는데 혀를
▲ 인간에 대한 예우가 끔찍했고, 예술을 사랑했던 차일혁 총경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기자] 저번에 차일혁 총경에 대한 글을 기고했는데, 차일혁 총경이라는 분을 전혀 몰랐던 분들에게는 그 시대에 그런 분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당시 시대 상황에 어떻게 빨치산 대장의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느냐 하는 놀라움이 컸을 것입니다. 사실 차대장이 처음부터 장례를 치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차대장이 사살 보고를 하니 경찰 간부가 이현상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울로 보냅니다. 우리 사회에 꼭 이렇게 과잉 충성하는 사람들 있죠? 그런데 이대통령이 보기 싫다고 거절하여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가 시신은 다시 돌아왔는데 이현상의 친척들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차대장은 토벌을 함께 한 정인주 총경과 상의하여 정중히 화장해주기로 한 것이죠. 왜 있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 적장을 죽였을 때 적장으로서 예우를 갖춰 장사지내는 얘기 말입니다. 차대장도 서로 한판 겨루었던 상대로서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이후 정인주 총경은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 ▲ 6.25 전쟁 중 구례 화엄사 소각을 면하게 한 차일혁 총경.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위의 글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토벌대 대장 차일혁 총경이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던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라는 글입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당시 남쪽의 토벌대 대장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좀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차대장은 한민족이 이데올로기에 찢겨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이현상을 사살하고도 차대장은 이현상의 시신을 적장에 대한 예를 갖추어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위 시는 1922년 3월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봄비입니다. 화곡로를 따라 서울시를 막 벗어나면 고강지하차도가 있는 삼거리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매번 좌회전하면서 수주 선생을 쳐다만보고 가다가 어느 날은 수주 선생을 뵈기 위해 차를 세웠습니다. ▲ 부천시 고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안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 때 안산에 오르기 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잠시 들렀습니다. 안산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연세대 뒷산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바로 이 산 반대편 자락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는 것이죠. 하긴 이날 같이 등산하는 분들 중 대부분이 안산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독립문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니 바로 앞에는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웠기에 당연히 이곳에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겠죠. 이번에 독립문을 자세히 보니 독립문 앞에 두 개의 큰 초석이 있습니다. 무얼까 하고 보니 헐어버린 영은문의 주초(柱礎)이더군요. 여태 무심코 지나쳐서인지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가 있는 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문화재청 제공) 또 그 옆에 독립관이 있어, 어? 독립문 세울 때 그 옆에 독립관도 세웠었나? 하며 보니,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인데, 서재필 박사는 영은문은 헐면서도 모화관은 그대로 두고 독립관으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였네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 때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한글로 쓰인 비석중 가장 오래된 비석을 보러 갔습니다. 이 비석은 1536년(중종 31)에 이문건이 자기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문화재 이름은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입니다. 원래 이 앞에는 고령 신씨의 묘만 있었고 이윤탁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윤탁의 묘를 이리로 합장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영비(靈碑)라는 제목으로 비석을 세우면서 여기에 한문과 함께 한글도 새긴 것이랍니다. 조선 시대 묘비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는데, 그럼 이문건은 왜 여기에 한글을 새겼을까요? 한글 비문을 현대어로 하면 이렇습니다.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제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문건은 한문을 모르는 상놈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 한글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 서울 노원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문화재청)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비만 있었는데 지금 한글고비는 비각 안에 곱게 모셔져 있고, 또 예전보다 더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강북에 초안산(楚安山)이라는 해발 114.1m의 야산이 있는데, 녹천역 뒷산이 바로 초안산입니다.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창작스튜디오를 갔을 때 바로 근처에 초안산이 있어서 올라가보았습니다. 왠 무덤들이 그리 많은지... 요즈음 형성된 공동묘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입니다. ▲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초안산(楚安山) 왜 여기에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있을까요? 조선시대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에는 한양에서 십리(4.7km) 이내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서울의 4소문 가운데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지 않습니까? 이 문으로 나간 시체가 10리를 바로 벗어난 곳에서 편히 쉴 곳으로 최적지가 바로 초안산이었습니다. 도봉산, 북한산 일대도 자격 요건에는 해당되지만, 이 산들은 산세도 험하고 돌산이라 묏자리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지요. 더군다나 풍수지리로도 초안산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안 이씨 문중에서도 초안산에 묘역을 써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초안산에 입주한 망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시입니다. 내시들은 동류의식이 있어 죽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신항서원에 배향된 또 다른 인물에 충암 김정(1486-1521) 선생이 있습니다. 충암은 제주 오현단의 시초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즉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제주시에 지은 것이 시초가 되어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이 여기에 배향됨으로써 5현단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주 오현단의 다섯 현인중 3명(송인수, 김정, 송시열)이 청주 지역 사람이네요. 참 제주의 명문고등학교 오현고등학교의 이름이 바로 이 오현단에서 유래된 것은 제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충암은 중종 때 조광조를 도와 훈구파의 척결에 앞장섰는데, 그렇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척결 대상에 올랐지요. 다행히 영의정 정굉필의 옹호로 죽음만은 면하고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 대전 동구 신하동에 있는 충암 김정 무덤 옆의 사당. 사당에는 부인 송 씨의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문화재청 제공) 진도 벽파진에 있는 정자 벽파정의 현판에는 충암의 시 벽파를 떠나며(渡碧波口號)가 걸려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