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청주 표충사에 들렀을 때, 표충사를 물러나와 신항서원도 들렀습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유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청주지역의 첫 번째 사원으로 건립되었고, 1660년(현종 10)에 신항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신항서원에는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배향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곳에도 당쟁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청주 지역의 유림들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런 분쟁의 씨앗을 심은 것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신항서원에 율곡 이이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배향 순서를 기존에 배향된 청주 출신 성리학자들을 제치고 이이를 맨 앞으로 하였습니다. ▲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배향한 신항서원(문화재청 제공) 더욱이 송시열이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항서원은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어, 신항서원 운영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불만을 갖게 되었죠. 이후 청주지역에서는 자파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파의 서원을 추가 건립하는 등으로 14개의 서원이 난립하였다는군요. 이런 것도 한 원인이 되어 이인좌의 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재판 때문에 청주지방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을 끝내고 우암산 밑의 표충사(表忠祠)에 들러보았습니다. 표충사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표충사는 바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지요.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입니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청주 표충사 (淸州 表忠祠),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표충사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위 3명의 충신들 보다는 기생 해월입니다. 일개 기생이 표충사에 함께 있다니 이상하지요? 해월은 비장 홍림의 애인으로 해월의 열녀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생과 열녀라. 이것도 뭐가 잘 안 맞는 조합 같은데, 실은 비장 홍림이 살해당하자 해월이 홍림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하였기에 열녀문을 세워준 것입니다. 곧바로 자결한 것은 아닙니다. 홍림이 살해당할 때 이미 뱃속에 홍림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 7살까지 키우다가 자결한 것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는 효촌리(孝村里)라는마을이 있습니다.마을 이름에서 금방 이 동네에서 효자가 낫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 효자는 바로 신항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경연(慶延)입니다. ▲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경연 효비각 경연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을 때 엄동설한에 연못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드렸고, 또 눈 덮인 산 속에 시루를 엎어놓고 고사를 드려 고사리를 돋아나게 하여 이를 요리하여 아버지에게 드렸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6년 동안이나 시묘 생활을 하였구요. 이런 효행을 들은 성종이 경연을 불러 사재감(司宰鑑, 조선시대 궁중의 어류・육류・소금・땔나무・횃불 따위 일을 맡아보는 관청) 주부를 내리고, 이후 이산 현감의 벼슬도 주었습니다. 그보다 한참 뒤 숙종은 경연의 효행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효촌리에 효자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청주에서 문의 가는 큰길가에 그 효자비가 비각 안에서 비를 피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요. 경연은 자신만 효자였을 뿐 아니라 인근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도미부인 이야기를 하다보니 개로왕이 백성의 아내를 강탈하기 위하여 참 못된 짓을 많이 한 임금으로 생각되네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 첩자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당시 고구려왕은 남진정책을 펼치는 장수왕이었는데, 장수왕의 남진정책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근처까지 쳐들어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죽인 원한을 갚겠다는 것도 많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둑을 잘 두는 도림이라는 스님을 첩자로 파견합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 실력에 반하여 도림을 상객(上客)으로 삼아 도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요.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대궐이 너무 좁다, 제방을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등으로 개로왕에게 큰 토목공사를 부추깁니다. 가뜩이나 재정이 빈약한 백제는 이러한 토목공사로 나라 곳간이 비고, 백성들도 생활이 어려워져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검단산에서 내려다본 한강 장수왕은 드디어 때는 왔다 생각하고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지요. 이로서 한성 백제는 망한 것입니다. 개로왕은 자신의 잘못으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고교동창들과 팔당대교 쪽의 안창모루에서 검단산을 올랐습니다. 안창모루 바로 옆 마을은 바깥창모루입니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죠? 창모루는 창고 모퉁이 나루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옛날 세미(稅米)를 하역하여 보관하던 창고가 이 근처에 있었기에 생긴 땅이름이지요. 검단산 근처에 이런 재미있는 지명이 또 있습니다. 팔당댐 근처의 검단산 밑 마을 이름이 배알미동입니다. 관리가 낙향하거나 귀양 갈 때 여기서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마지막으로 배알(拜謁)하였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랍니다. 검단산을 오르다 잠시 쉬면서 한강 건너 예봉산과 예빈산, 적갑산을 바라다보고, 발밑으로 한강이 흘러가는 것도 내려다봅니다. 팔당대교에서 팔당댐 쪽으로 조금 오른 곳은 예전에 도미나루가 있었던 곳입니다. 오늘은 도미나루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지요. 도미나루라는 이름은 도미부인이 이곳에서 개로왕의 추격을 피해 배를 탔다고 하여 도미나루라고 부른답니다. 도미부인! 많이 들어보셨지요? ▲ 검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 본 전경 백제 개로왕 시절에 아름답고 행실이 곧은 도미부인에 대한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개로왕은 도미를 불러 네 부인이 아무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에 갔을 때, 미술관 앞 마로니에 공원에 한 잘 생긴 남자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상옥 열사(1890. 1. 5. - 1923. 1. 22.)의 동상이었습니다. 동상 옆 안내문을 보니 김열사는 1923년 1월 22일 1천여 명의 일본 경찰과 접전하다가 최후의 한 발로 자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 열사가 발을 딛고 선 대리석에는 김 열사가 거사를 위해 상해를 떠나기 전 동지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고.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그동안 김상옥 열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저는 이런 내용을 보고 부끄러워 집에 와서 김상옥 열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김 열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였더군요. 김 열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공부하고픈 아들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합니다. ▲ 순국한 김상옥의사 부인과 어머니 김점순여사의 한식 성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가끔 독립운동사를 읽다보면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훌륭한 인물을 알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최재형 선생도 그런 분입니다.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분입니다. 안의사는 이등박문을 암살하기 전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병을 조직하고 무기를 지원하고 자금을 댄 분이 최재형입니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1907년 왜놈들이 우리나라 군대를 강제해산 하고 난 후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의병들 가운데 많은 의병들이 왜놈들의 탄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는데, 이런 의병들을 불러 모은 분이 최재형 선생이지요. 그런 자금력이 있었기에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임정에서는 최재형을 재무총장에 임명하기도 했었구요. 그럼 최재형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요? 사실 최재형은 함경도 출신으로 노비의 아들이었습니다. 최재형은 1860년대 심한 기근으로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지요. 그러나 연해주로
▲ 《신흥무관학교》, 안천, 교육과학사, 1996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 6. 29. 안중근 기념관에서 열린 듀오 아임의 인문학 K 팝페라 갈라 콘서트에 갔을 때 안중근 기념관의 이혜균 부장으로부터 안천 서울교육대학 교수가 쓴 책 3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중 《신흥무관학교》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적혀 있더군요. 책의 제목은 신흥무관학교이지만 책은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생 안명근 의사의 활약,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활약, 청산리 전투의 숨은 주인공 서일, 김광서 투사 등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 눈길을 끝 것이 뮈텔 주교의 일기장입니다. 뮈텔 주교는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죽은 1933년 1월 14일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이 일기장에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던 사실이 드러났고, 안 교수는 이를 근거로 천주교의 반민족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도로 마지막 사형 집행 전에도 빌렘 신부로부터 미사를 집전 받지 았았습니까? 안 의사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아버지 안태훈 진
▲ 《병자호란》, 한명기, 푸른역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한명기 교수가 쓴 《병자호란》을 읽었습니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 발생 전부터 후까지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파헤쳐 1권으로도 부족하여 2권으로 책을 냈네요. 책을 읽으면서 인조정권의 무능함에 혀를 차고, 쓸 데 없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전쟁을 자초하더니,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의 안전은 생각함이 없이 자기들만 내빼는 비겁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강화도를 책임진 검찰사 김경징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는 세월호 선장이 승객들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내빼던 생각과 겹쳐 잠시 책을 덮고 분을 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을 읽으면서 얘기하고 싶은 많은 부분이 많지만, 김경징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김경징의 멸공봉사입니다. 한 교수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제목을 이렇게 붙였겠습니까? 청군이 남진하자 인조는 며느리 강빈과 봉림대군 등 왕실의 피붙이들과 조정 대신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인조도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마포구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구한말 선교의 푸른 꿈을 안고 낯설고 물 설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 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 청춘을 바치다가, 이역의 땅에 몸을 묻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묘원이지요. 얼마 전에 그 선교사 묘원을 돌아보면서, 많은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자기 피와 땀을 바친 것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시 최하위 계층이었던 백정에게도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푼 사무엘 무어(Samuel Forman, Moore, 한국명 모삼열, )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 백정도 사랑한 사무엘 무어(Samuel F.Moore, 1860~1906) 선교사 미국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사무엘은 1892년 32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전도로 지금 소공동 롯데호텔이 들어선 자리에 곤당골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엽니다. 이 학교 학생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 봉출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교사는 봉출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다 죽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박 씨를 문병한 사무엘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 고종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