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유시집(北遊詩集)》을 쓴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중학 동창 백승천으로부터 시집을 하나 받았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이 쓰신 한시 원문과 번역시가 실린 시집입니다. 북유시(北遊詩)라고 하니까, 세심당 선생이 북쪽 지방을 유람하며 쓴 시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세심당 선생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는, 경고서사(警告書社)를 써서 친지, 문하생들과 호남 각 군의 서사에 돌리며, 의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 최익현 선생을 뵙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자 1905. 11. 23. 고향 보성에서 길을 떠나 장흥, 곡성, 남원, 전주, 충주, 옥천, 공주, 청양 등의 유림과 친지를 순방하고, 면암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는 1905. 12. 30. 귀향합니다. 북유시는 이 순례 기간 동안 쓴 220여 편의 시로, 세심당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쓴 시를 정리, 편집하여 1906. 1. 12. 북유시집을 만듭니다. 그 동안 북유시집은 한시집으로만 남아있어 일반인들의 열람이 어렵다가, 1986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북한산 둘레길 1구간부터 4구간까지에는 애국지사들의 묘소가 많습니다. 1구간 소나무 숲길에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2구간 순례길에는 심산 김창숙,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 애국열사 12분의 묘소가 있고, 또한 동방석, 김유신 등 광복군 18분이 한 묘소에 같이 잠들어 있네요. 뿐만 아니라 순례길을 가면서는 4・19 국립민주묘지도 만나볼 수 있군요. 그리고 2구간이 끝나고 3구간이 시작되는 곳에는 이준 열사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소들 중에는 아무래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잘 단장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이준 열사의 묘가 잘 꾸며져 있습니다. ▲ 참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이분들 중에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1879~1962)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김창숙 하면 탤런트 김창숙씨를 먼저 떠올릴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김창숙을 검색하여도 탤런트 김창숙씨가 먼저 나오데요. 심산 김창숙 선생, 선생은 진짜 선비이셨지요. 단순히 옛것만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새것도 받아들이려는 열린 유학자이셨습니다. 아마 조선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의 순례길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군인 광복군 18분이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헌법에 우리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였으니까 저는 광복군을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군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18분이 함께 잠들어 있을까요? 이들은 국내에 아무 친인척이 없는 분들이지요. 그나마 18분 가운데 한분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북한산 둘레길에 있는 광복군 무연고 18위 합동묘소 ⓒ 김영조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신 분들이지만 무연고로 돌보는 이 없다가 1967년 광복군 동지회에서 이곳에 합동묘소를 조성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이곳에 잠든 후에도 후손이 없으니 찾는 이 별로 없는데 광복군동지회와 흥사단에서 제례를 지내주고 있습니다. 무덤 오른쪽에 서있는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안히 잠드시라. 1967년 이곳에 합동묘소를 만들 때 생존하였던 광복군 동지가 쓰신 시입니다. 여기에 묻히신 이 가운데는 태항산에서 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북한산 순례길을 걸을 때 단주(旦洲) 유림(柳林, 1898~1961) 선생의 묘소에 이르니 거북이 입을 꾹 다물고 선생의 비석을 등에 지고 있고, 민화에 나올 것 같은 호랑이 2마리가 양옆에서 선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단주 유림 또한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45. 12. 2. 임시정부 요인들이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김포 비행장에 내렸을 때, 귀국한 임정 요인에 단주 유림도 있었습니다. ▲ 단주(旦洲) 유림(柳林, 1898~1961) 선생 그런데 유림은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무정부주의자가 임시정부에 있었다니 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본 학자가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번역하는 바람에 아나키스트 하면 굉장히 과격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유림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해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해왔으나, 안(an)은 없다의 뜻이고, 아르키(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력, 전제정치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안아르키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강제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 수요일(2014. 7. 9.) 세종문화회관 본관 1 전시실에서 중리 하상호 선생님의 서예 작품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전시회 제목은 하늘의 길, 붓의 길 가다입니다. 붓의 길은 알겠는데, 하늘의 길은 무엇일까요? 중리 선생의 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이 성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성경 구절을 쓰신 것도 있고, 주님의 향기, 성령 충만처럼 믿음의 언어를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이날 사회를 본 임병걸 케이비에스(KBS) 보도위원은 이에 더하여 중리 선생이 붓을 잡으신지 지천명(知天命)의 햇수를 지난 55년이니, 중리 선생이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붓을 놀리셔도 하늘의 뜻이기에 하늘의 길, 붓의 길 가다가 아니겠냐고 하네요. ▲ 인사말을 하는 중리 하상호 선생(위), 자클린드의 눈물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이완이 ▲ 커다란 붓으로 相愛라는 글씨를 쓰는 중리 하상호 선생 전시회는 음악과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보통 다른 전시회 개막식도 음악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전시회 개막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음악회였습니다. 중리 선생님의 인사가 끝난 후, 처음 등장한 첼리스트 이완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클린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안중근 의사 의거 발자취를 따라서 하얼빈과 여순을 다녀오면서, 안의사 의거와 관련이 없지만은 하얼빈에서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 유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사람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731부대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현장을 방문하니까 일제의 잔혹함에 다시 치가 떨렸습니다. ▲ 하얼빈 731부대 유적지 표지석 ▲ 하얼빈 731부대 유적지의 생체주사 놓은 장면 731부대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많이 들으셨겠지만, 몇 가지만 다시 얘기해볼까요? 먼저 그들은 원심분리기에 사람을 집어넣고 고속으로 회전시켜 눈・코・입・귀・항문으로 피가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는 실험 곧 착혈실험을 했으며, 동상실험이라 하여 혹한의 날씨에 팔다리를 얼음물에 담가 얼렸다가 해동한다고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거나, 냉동실에서 손을 급속으로 얼려 망치로 깨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한 줄로 세워놓고 맨 앞 사람 가슴에 총을 대고 발사하여 몇 사람까지 총알이 관통되나 알아보는 총 성능 실험, 망가진 전차 속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화염방사기를 쏘아 얼마나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랴오둥[遼東]반도 남단부에 있는 군항도시 여순에서 러일전쟁의 격전지 203 고지를 가보았습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기항하고 있던 여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였지요. 그런데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게 여순항을 점령하지 못하자 여순항이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 점령에 사활을 겁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만 명이 훨씬 넘는 전사자를 내고서 겨우 고지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고지에서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향하여 맹포격을 가하여 함대를 격침하고서야 겨우 여순을 점령할 수 있었지요. 이 전투를 이끈 일본군 사령관이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입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긴 하였지만 너무 많은 일본군의 희생이 뒤따랐기에 노기 사령관에 대한 비난 여론도 잠깐 일었는데, 여순 공략전에서 노기의 두 아들도 전사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노기는 명장으로 성가가 올라가지요. 그런데 노기는 나중에 단순한 명장에서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받습니다. 곧 1912년 명치 일왕이 사망하자 일왕 장례식 밤에 본인도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하면서, 사람들은 노기를 군신으로 추앙하며 신사(神社)까지 세우지요. 부인과
▲ 나눔문화에서 전시회의 감동을 나누고자 전시회의 기록들을 정리한 책 표지《다른 길 열리다(회원용비매품)》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관에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다른 길이 열렸었지요? 따로 홍보도 하지 않고 기업체 등에 표를 뿌린 것이 아닌데도, 27일간 3만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전시장을 다녀갔습니다. 영화로 치면 1,000만 관객이 든 것입니다. 전시회가 끝난 후 전시회를 주최한 나눔문화에서 전시회의 감동을 나누고자 전시회의 기록들을 정리한 《다른 길 열리다(회원용비매품)》라는 책자를 냈습니다. 전시 코디네이터인 김예슬(김예슬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하고는 다니던 고대를 자퇴한 당찬 의식 있는 여성)은 머리말에서 박노해 시인과 함께 천 일간의 준비, 27일간의 전시를 진행하며 감동의 순례 행렬 그 모든 순간들을 지켜봐온 코디네이터로서, 각자 나만의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디딤돌로 삼기를 바라며 우리 시대 희망의 씨알 하나 남기고자 이 책을 펴낸다고 했습니다. 김예슬은 말합니다. 현대문명이 정점에 달한 시대에 박노해 시인의 사진은 우리가 돌아 나아가야 할 좋은 삶의 원형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누드 크로키전을 보러 안나비니 갤러리 갈 때에 정릉 골짜기 건너편의 경국사도 가보았습니다. 경국사는 고종의 왕위 등극 축하 재가 열렸던 절로 고려 충숙왕 때 자정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원래 청봉(靑峰) 아래에 있다고 하여 청암사(靑巖寺)라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나라에 경사가 끊이지 말라는 바램을 담아 경국사(慶國寺)라고 하였다는군요.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릉천을 건너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니 경국사도 어김없이 부도밭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책을 펼쳐놓은 모습의 돌조각이 보입니다. 불교백과사전인 불교 대사림 편찬 발원문이라는데, 2012년 1월에 이곳 경국사에서 입적하신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조성한 것입니다.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대표적 학승(學僧)이라 여기에 이런 발원문도 남기신 것이겠지요. 실제로 지관스님은 작년까지 총 12권의 불교 대사림을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 정릉 경국사, 가운데 가람이 극락보전 부도밭을 지나 오르니 관음전이 나타납니다. 문화재 설명판을 보니 이곳 관음전에는 숙종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의정부 재판 갔다가 의정부 교도소를 거쳐 돌아올 때 송산을 지나는데, ‘정문부 장군 묘’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정문부 장군? 가만있자... 누구더라?' 한 번 들어본 것 같은데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큰 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운전하는 직원 보고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하였지요. 도착하니 장군의 묘는 건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정부시가 그만큼 팽창했다는 얘기이지요. 정문부 장군(1565~1624)은 원래 문관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경도 북평사로 있었습니다. 선조는 왜군에 쫓겨 의주로 피난가면서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두 왕자가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왔을 때 국경인(鞠景仁 )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깁니다. 이에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고, 나아가 경성, 길주 장평 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합니다. ▲ 정문부 장군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북관대첩비(복제)/왼쪽, 북한으로 돌려주기 직전 고궁박물관 뜰에 잠시 세워두었던 북관대첩비(ⓒ 김영조)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