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의 <삼불제석(三佛帝釋)>은 한지를 비단에 배접하여 조성한 것이다. 무라야마지쥰이 보고한 자료에서 삼불제석은 복개당 내부 가운데에 주신으로 모셔져 있는 세조존영 그 양측에 각각 삼불(三佛) 한 장이 걸려 있다고 한 그림 중 하나이다. 삼불이라고 말한 두 개 그림(‘삼불제석’과 ‘아미타여래삼존불’)의 좌우 배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삼불이라고 부르는 무신도가 세조존영 양쪽으로 각각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개당 삼불제석은 불화의 제석천 그림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그림이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무속화가 불화 기법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무속화는 불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그 형식이 불화와 비슷한 경우가 아주 많다. 더군다나 복개당의 <삼불제석>은 화승이 그렸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복개당의 불교식 그림 <아미타여래삼존불>을 보면 불화 영향이 얼마나 많이 미쳤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마타여래삼존불도 무속신앙의 부처신으로 봉안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이 헐린 지 20여년이 지난 1998년, 복개당 자료 14건이 국립민속박물관 유물 공개구매에 의해 이동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산 14건의 유물 가운데 무신(巫神) 그림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관우>, <장비> 등 모두 6점이다. 복개당이 헐리는 과정에서 무신도 이외의 여타 물건들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이 모연하다. 무신도를 포함한 일부가 동대문에 있는 관성제군묘(동묘)로 옮겨 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신도 6점만이 복개당 무신도의 전부 인지는 의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복개당 무신도로 분류된 6점 가운데 정확하게 복개당 것으로 확인된 것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등 4점뿐이다. 이 그림들은 불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월파(月波), 삼여(三如), 행활(幸活) 등의 화승(畵僧)들이 1868년 복개당 중수 시점을 전후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그림에 사용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마을신앙이 지연공동체로 존립되어 진다는 것은 학계의 조사 연구에 의해 확인되는 바다. 이와 같은 공동체 신앙 형식의 특징은 한 곳에 정착된 거주민들이 각자의 이익을 도모키 위해 서로간의 유대관계 속에서 존속시킨다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되어진 지연공동체 신앙은 고대사회에서 있어온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천신제 등을 통해 옛 모습을 불 수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마을신앙으로 까지 이어져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을신앙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신앙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신앙이 이토록 오랜 세월 버티어 오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화합과 단결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지연적 공동체 유지이다. 의례를 규정화하여 마을 사람들이 특정 신앙 대상과 의례 기간을 정하고 이를 신성시하면서 속(俗)에서 성(聖)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려는 것이 마을신앙의 지속적 존립을 위한 고단위적 계산인 것이다. 악가무극이 동원될 수 있는 연희적 부분들을 두드러지게 표면화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신명풀이로 명분화하여 신인합일의 의지를 가지려는 것도 마을신앙의 주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유래와 성격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던 복개당은 철거되기 직전까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福介堂)은 서울 마포에 있었던 있었지만 1977년부터 1978년 사이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사라졌다. 이 글에서는 복개당이 없어진지 수십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부분적으로 남겨진 기록 자료와 실물자료를 토대로 민속 현장의 과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마을민의 신앙처로 자리매김 되었던 당의 유래, 의미, 남겨진 무신도, 의례 내용 등을 살펴봄으로써 변화 속에서의 서울지역의 마을신앙 한 면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 것에 대한 지난 ‘민속쓰기’에 가치를 두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라져간 또 다른 민속현장의 실체를 담론화 작업에 필요하게 여겨질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 시피, 전국의 많은 신당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근대화, 도시화, 서양화 바람과 함께 전국의 수많은 유무형 민족유산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곳곳의 신당들도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80년대부터 본격화된 국토 개발사업의 하나로 급속하게 진행된 곳곳의 아파트와 고빌딩 건축, 도로 신설과 확장 등이 큰 요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 땅에 전래되어온 묵은 민족의 신당들이 급속하게 사라지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목멱산대천제(木覓山大天祭)’는 조선 건국 이념을 담아 계승된 산천 신앙의 한 축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종묘와 사직에 제를 지내면서 목멱산에도 대천제를 올렸다. 범민족적 산악숭배 사상을 표방하고 천지를 감동케 하여 나라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시화연풍(時和年豊, 시절이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목멱산대천제는 나라 안녕과 백성 통합을 위한 국중행사와 다를 바 없이 겨레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문화의 뿌리를 되살리고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범국민적 축제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해발 270m 높이의 ‘목멱산(木覓山)’을 ‘남산(南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조선에서 정궁으로 삼았던 경복궁(景福宮) 맞은편인 남쪽에 있으면서 조선시대 한양의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한성부를 지켜주는 수호산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그리하여 남산(南山)은 북악산(北岳山), 낙산(駱山), 인왕산(仁王山)과 함께 서울 분지(盆地)를 둘러싼 자연 방벽으로 역할 하게 된 것이다. 한양 성벽(城壁)도 이와 같은 사산(四山)의 능선에 따라 쌓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또한 그러한 균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당인동 부군당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당인동 15-3번지에 있는 마을당이다. 100여 ㎡의 국유지에 두 칸으로 된 목조기와집으로, 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면적 14㎡로 된 가로 4m, 세로 5m 규모의 당집이다. 두 짝으로 된 부군당 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당이 들어앉은 자리는 예전에는 165㎡ 정도였으나 현재는 좁아진 상태이다. 당 내부 천장 대들보에 “단기사이팔칠년갑오 구월이십구일미시 상량(檀紀四二八七年甲午 九月二十九日未時 上樑)”이라고 기록된 상량문을 보아 1954년에 당을 새롭게 손질하면서 현재의 규모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부군당은 원래 현재의 위치보다 높은 산 쪽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군당이 있던 땅이 이참판댁 소유였고, 그곳에 묘를 쓴다고 하여 당을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을 옮기고 나서 그 동네 처녀 총각들이 놀아나고 또한 당인리발전소가 들어서게 되자 195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다. 따라서 당인동부군당은 세 번의 이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에는 당 내부 단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그러나 당에 모셔진 신령 그림들은 1912년 무렵에 백년사에서 조성해 온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화주당 지킴이 톺아보기 화주당 당지기 조영환은 1944년에 태어나 올해 74살이다. 조점석과 양동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조영환은 4남 6녀 10남매 가운데 장남이다. 조영환의 형제 중 두 명은 6ㆍ25 동란 때 죽었다. 조영환은 한때 동대문에서 포목장사를 하다가 1985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여주로 이주하여 양계장을 운영하였다. 이후, 아파트 경비원을 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화주당으로 들어가 살면서 당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물림되어 온 지킴이의 운명을 안고 부인과 함께 화주당을 지켰다. 조영환의 부인은 2살 아래인 문정자이다. 조영환과 문정자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자녀 중 무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 조영환 문정자 부부는 화주당을 떠날 때까지도 남한산성 청량당을 큰집으로 삼고 있었으며 화주당을 작은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화주당 당지기는 부자(父子)지간으로 대물림돼 온 부계 전승 계도로 이어져 왔었다. 그러면서 당에 관한 실질적인 일은 고부(姑婦) 전승 때문에 이어져 왔다. 화주당에서는 당지기를 시봉자라고도 하는데, 역할에서는 부부가 분담하여서 하였다. 이를테면, 경제적 측면서의 권한이나 단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623-1649) 즉위 2년인 1624년에 경기도 광주 유수(留守) 이서(李曙)가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공사를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한양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으로써 주봉인 청량산(해발 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그리고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은 곳이다.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지만, 안쪽은 완만하여 적의 접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어 또한 유리하게 하였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이 함께 연결돼 견고한 방어망이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남한산성에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고 있어 그 역사는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의 남한한성은 성벽과 성안에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將臺), 돈대(墩臺), 보(堡), 누(壘), 암문, 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의 정도가 남아 있다. 어찌 되었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2017년에 자취를 감춘 화주당(化主堂)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96-9번지 대지 약 150여 평 위에 있었던 서울의 신당이었다. 원래 위치는 그 보다는 더 위쪽에 있었고 그곳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아시안게임 2년 전인 1984년 지역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옮겨졌던 것이다. 이전되어 빌딩 숲에 같히기 전인 80년대 까지의 화주당은 멀리 대모산(大母山, 291m)이 눈에 들어 왔을 정도로 주위 환경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지만 서울의 강남 개발로 차츰 환경이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당 역할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2017년 7월에 이르러서는 그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화주당에 봉안되었던 주신(主神)은 이회 장군이다. 이를 한편에서는 대감이라 칭했지만 화주당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당지기 조영환, 문정자 부부는 끝까지 장군으로 모셨다. 전래 담에 따르면, 이회 장군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으나 훗날 그의 충렬정신이 밝혀져 민중들에 의해 충렬신(忠烈神)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모신 신당 또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화공은 꽃 제작뿐 아니라 신도(神圖)를 꾸미고 굿에 쓰이는 장식품을 제작하는 무속세계의 종이 다루기 전문가이다. 화공의 꽃일은 굿판 외에도 사대부집 큰 잔치나 장례식 또는 절간의 재에서도 이루어졌었다. 이를 테면, 황해도 화공으로 이름 석 자를 날렸던 배문일(남, 1900~1992)은 황해도 연백출신으로 한국동란 때 남하하여 1980년대 까지도 황해도 무당들을 대상으로 화공을 일을 하였던 인물인데 젊은 시절 사대부집 큰 잔치에 불려가 상화를 제작하였고 장례식에 필요한 꽃이나 절간의 장엄지화를 제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와는 달리, 절간에서 화만(華鬘, 불전공양에 사용되는 꽃다발)을 제작하였던 스님들 또한 무속의례에 사용된 신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은산 별신제에서 사용되는 신화를 근래에까지 인근 절에 부탁을 하였다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다. 1988년 당시 은산에서 장의용품을 판매하는 홍용포씨(71세)가 굿에 사용되는 신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20~30여 년 전에는 마을 주민인 최왕대, 윤삼봉이 만들었으며, 그 윗대로 올라가면 절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로보아, 1950대 전까지는 스님들이 무속 꽃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