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아침에 출근을 하며 봄날의 긴 하루를 시작합니다. 출근길에 각종 모종을 파는 가게를 지나면 왠지 풋풋한 마음이 됩니다. 그 모종을 심을 텃밭 한 뙈기 없는데도 말이지요. 유년시절 농사지을 때는 얼마나 바쁜지 고사리 손을 빌리기도 해야 했습니다. 산자락에 달라붙어있는 다랭이 논은 전형적인 천수답이었는데 모내기를 위하여 논에 물을 들이고 소에 써레를 달아 논을 삶아 놓으면 부드러운 흙이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감촉이 참 좋았습니다. 땅을 파고 무언가를 넣고 다시 흙을 덮는 것엔 묻는 것과 심는 것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차이는 생명의 유무에 있습니다. 논이나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을 심는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 열매를 맺는다는 희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쓰레기나 불필요한 물건은 묻는다고 표현합니다. 그건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음을 의미하지요. 곧 심는 것은 생명이지만 묻는 것은 죽음입니다. 흙 속에 무언가를 심게 되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가뭄엔 물을 주기도 하고 성급한 사람은 싹이 얼마나 나왔는지 땅을 파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묻음은 잊음을 전제로 합니다. 우린 심는 것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녹비에 가로왈”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여기서 ‘녹비’는 원래 鹿皮(녹피)가 맞습니다. 사슴 가죽을 의미하지요. 사슴 가죽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리하여 당기는 대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곧 녹비에 曰(가로왈)자를 써 놓으면 위 아래로 당기면 日(날일)자가 되고 좌우로 당기면 曰(가로왈)자가 됩니다. 곧 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린 자신의 경험 속 범주 안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대학에서 한문을 전공하여 아이들에게 15년 동안 한문을 가르치다가 뜻한바가 있어 컴퓨터 부전공을 이수하고 정보로 전과하여 19년째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과자인 셈이지요. 문과와 이과 공부를 더불어 했는데 문과 공부를 할 때는 수학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단순히 마트에서 장보고 계산을 제대로 하면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었지요. 하지만 컴퓨터를 공부하고 있노라니 수학이 아니면 풀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수학이 없다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아프게 깨달은 적이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녹비에 가로왈처럼 자신의 입장에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