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舍利莊嚴具) 는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내 발견 유물일괄은 1970년 기울어졌던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것으로 모두 9종 12점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대체로 10∼11세기 경에 제작된 유물들이어서 석탑이 건립될 때 함께 납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괄 유물로는 은제도금여래입상과 청동사리외합을 비롯하여 은제내합, 호리병 모양의 수정사리병, 금동제 사각향갑, 청동거울, 전신사리경 두루마리, 수라향갑 주머니, 명주보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내 발견 유물일괄은 고려시대 초기의 금속공예사의 현황과 불교사상의 변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성불사 절터에 있는 불상으로, 현재 머리와 목 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상체와 하체는 딴 돌로 만들어져 분리될 수 있다. 상체는 떡 벌어진 어깨와 발달된 가슴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얇은 옷을 몸에 밀착시켜서 잘록한 허리가 더욱 강조되었다. 양 어깨에 두른 옷에는 U자형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도식적인 옷주름 처리로 사실성이 결여되고 조각수법의 미숙으로 생동감이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 어깨와 손목 부분이 깨졌는데, 다소 부자연스럽게 표현된 두 손은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다. 왼손은 팔을 약간 벌린 듯 구부려 왼쪽 가슴에 얹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채 배에 대고 있는 듯 하다. 하체는 다리의 두께가 가슴과 복부보다 얇아 상체에 비해 양감이 훨씬 떨어지는 모습이다. 대좌는 4각형의 평평한 돌 위에 원형의 연꽃무늬를 새긴 형태이다. 연꽃무늬 위에는 몸체를 꽂을 수 있는 홈이 파여 있고 홈 앞에는 두 발을 도드라지게 새겨 발목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짧은 상체에 비해 하체는 불상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길어져 인체의 비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적이지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이 벽화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뒤 벽에 그려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구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자료: 문화재청>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70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의 높이는 115㎝, 입지름 71㎝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 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연뢰(蓮蕾)가 사각형의 연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입상이 표현되었다. 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명문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 18세기의 종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사인비구가 한국 전통형 뿐아니라 이처럼 중국종 양식을 따른 작품도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이하진은 조선중기 17세기의 문인ㆍ명필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매산(梅山)ㆍ육우당(六寓堂)이다.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 1560~1624)의 손자이며 이지안(李志安, 1601~?)의 아들이다. 1666년 문과에 급제, 대사간ㆍ대사성ㆍ예문관제학ㆍ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아들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는 학자ㆍ명필이었고, 이서의 이복동생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실학자로 유명하다. 『이하진 필적 천금물전(李夏鎭 筆蹟 千金勿傳)』은 이하진 후손 댁에 전래하는 것으로 표지에 “천금물전”이라 쓰고 오른쪽에 “공십(共十)”이라 쓰여 있어 전체 10첩임을 알 수 있지만, 각첩의 순서는 적혀있지 않다. 표지에는 각 첩에 실린 글씨의 첫 구절이나 제목을 쓴 목록이 붙여 있다. 수록된 필적은 자신의 애호물[琴鶴ㆍ詩酒ㆍ書畵ㆍ劒碁ㆍ長生瓢ㆍ九節杖ㆍ古劒ㆍ玄琴ㆍ書案ㆍ碁局ㆍ梅藏ㆍ怪石]에 관한 명(銘)을 비롯하여 동산(東山)ㆍ명월(明月)ㆍ북창(北窓)ㆍ청풍(淸風)”이나 “성서(城西)ㆍ초당(草堂)ㆍ매헌(梅軒)ㆍ죽오(竹塢)” 등의 대자서(大字書), 오언절구나 칠언절구의 당시(唐詩), 경서(經書)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이 그림은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양주(楊洲)의 소령원(昭寧園)을 그린 묘산도이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생모로 1718년(숙종 44)에 사망하여 양주 고령동 옹장리(현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묻혔다. 이때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이라 묘(墓)라 하였다가 1753년(영조 29) 소령원(昭寧園)으로 봉해졌다. <묘소도형여산론(墓所圖形與山論)>은 두꺼운 종이에 먹으로 상단에 제목을 쓰고, 가운데 산도(山圖)를 그리고, 하단에는 산론(山論)을 적었다. 이 그림은 길지를 택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18년에 제작된 원본일 가능성이 있다. <소령원도(昭寧園圖)>는 산도의 형식을 취했으며 가운데 묘소와 좌측의 제청(祭廳), 우측의 비각(碑閣)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이 그려져 있다. 산수 표현에서 가늘고 기다란 피마준(披麻皴)이 미점(米點)과 더불어 사용되었으며, 화면 곳곳에 밝은 담채를 가하였다. <소령원화소정계도(昭寧園火巢定界圖)>는 능원에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초목을 불살라 제거하는 화소(火巢)를 표시한 것이다. 붉은 주선으로 화소의 경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누구나 한번은 가야한 길, 저 세상으로 안내하는 상여소리가 부여 용정리에 전해온다.부여 용정리 상여소리는 호상소리라 하는데, 호상이란 복을 누리며 오래 살던 사람이 죽은 것을 말한다. 호상소리가 시작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소리꾼인 하운(호상놀이 예능보유자)씨를 통해 오래 전부터 전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용정리 상여소리는 진소리, 짝수소리, 두마디소리, 자진소리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상여꾼들이 나뉘어져 서로 다른 소리를 주고받는 짝수소리가 특징이다. 상여가 나갈 때는 가장 느린 진소리를 하다가 짝수소리가 시작된다. 짝수소리는 한 소리가 끝나면 후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시작된다. 곧 주고받는 형식에 겹쳐지는 소리 부분이 있어서 겹상여소리가 된다. 다른 두 가사를 노래하기 때문에 고도의 가창력이 발휘되며, 슬프고 장엄한 음악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짝수소리는 부여와 공주 일부지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소리로 백제문화권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소리이다. 부여 용정리 상여소리는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온 동네주민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엄한 소리로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자료: 문화재청&g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상동리삼층석탑 및 석불좌상 (上東里三層石塔및石佛坐像)은 인제군 남면 신남리의 암자에 있던 석탑과 석불좌상으로, 소양강댐을 만들면서 백련정사(白蓮精寺)로 옮겨왔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현재 탑신은 2층까지만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은 없어진 부재가 많아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위층 기단에는 각 면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1·2층 몸돌의 높이가 비슷하여 독특한 모습이고, 급한 경사를 보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이는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원래 3층 이상의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석불좌상은 불상의 어깨 윗부분이 잘려나가 현재는 시멘트로 머리부분을 만들어 놓았다.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심하게 닳아 있어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어깨 곡선이 부드러우며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로사나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료 :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청화산 기슭에 자리한 법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창건 당시에는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되나 소실되었고, 지금의 절은 나중에 소규모로 다시 세운 것이다. 절에 남아 있는 왕맷돌은 위ㆍ아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맷돌이란 정성스레 다듬은 2개의 돌을 아래ㆍ위로 포개어 놓고, 위의 돌을 회전시킴으로써 곡물을 갈게 되는 것으로, 윗돌에는 곡물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랫돌에도 곡물을 잘 갈리게 하기 위한 홈이나 구멍을 두는데, 이 왕맷돌은 모두 4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절에서 남쪽으로 200m 쯤 떨어진 곳에 반쯤 묻혀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원래는 스님들이 기거하던 요사채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하게 생긴 맷돌이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박물관, 우즈베크공화국 브라하박물관 등에도 전시되고 있어, 고대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