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아니 땔지라도 절로 익는 솥과 / 여무죽 아니 먹여도 크고 살져 한 걷는 말과 / 길쌈 잘하는 여기첩과 술 샘는 주전자와, 양부로 낫는 감은 암소 / 평생에 이 다섯 가지를 두량이면 부러울 것이 없어라." 이는 전통가곡의 하나인 남창가곡 '소용이'의 노랫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불을 안 때도 저절로 익는 솥, 여물을 먹이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이 찌고 잘 걷는 말과 길쌈 잘하는 여자 기생첩과 술이 샘처럼 솟아나는 주전자와 양볶이(소의 밥통을 볶아 만든 음식)를 먹을 수 있는 검은 암소, 평생, 이 다섯 가지를 가진다면 부러워할 것이 없겠구나!"란 뜻이지요. 가곡은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를 노래하는 한국의 전통 성악곡이며,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고도 합니다. 1969년 11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지요. 조선시대 궁중과 양반 사이에 즐겨 부르던 시조, 가사와 함께 정가(正歌)에 드는 성악곡으로서 판소리·민요·잡가와 같이 일반 백성이 부르던 성악곡과 구별됩니다. 시조의 시를 5장 형식에 얹어서 부르는 가곡은 피리·젓대(대금)·가야금·거문고·해금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데 그 예술성은 시조와 가사에 견주면 아주 뛰어났다는
우리 전통음식에는 밤, 대추, 생강, 연근, 인삼 따위를 꿀이나 설탕물에 졸여 만든 음식인 정과(正果)가 있습니다.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대추, 밤을 원래의 모양대로 꿀에 조린 것은 대추초, 밤초라 하고, 밤을 삶아 으깨어 꿀을 섞어 밤 모양대로 빚은 것은 율란(栗卵), 대추를 다져 꿀을 섞어 다시 대추의 모양으로 빚은 것은 조란(棗卵)입니다. 율란의 재료인 밤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칼슘, 비타민 등이 많아서 어린이의 성장에 좋다고 합니다. 특히 비타민 C는 피부미용과 피로회복, 감기예방 등에 효과가 있으며, 또 생밤 중의 비타민 C 성분은 알코올의 산화를 도와주어 술안주로 좋습니다. 당분에는 위장 기능을 강화하는 효소가 들어 있으며 성인병 예방과 신장 보호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꿀, 설탕에 조리거나 가루를 내어 죽이나 이유식을 만들고, 통조림, 술, 차로도 만듭니다. 레이디경향 2008년 11월호에 보면 “주한 카타르 대사 부인 나오미 마키의 ‘한국 찬가’”란 글이 나옵니다. 그 글에서 마키 여사가 기자에게 한국의 전통과자 “율란”을 아느냐고 물었고, “개성 지방의 전통 과자라고 해요. 과자를 만드는 과정이 또 예술이랍니다.”라고 하여 기자를 당혹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살 꽃본듣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밀양 아리랑)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만 주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정선아리랑) /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 ... 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노래로 꼽히는 아리랑은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요답게 지역마다 불리는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 아리랑에 관련한 사건이 근현대사에 두 번이 있었지요. 하나는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이고, 또 하나는 1991년 남북이 세계무대에서 함께 쓸 단가 ‘아리랑’ 제작입니다. 먼저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는 나운규 감독 ㆍ주연의 “아리랑”이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는데 개봉 첫날부터 유례없는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지요.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신성한 훈민정음에 사쿠라를 달지 마라! [서평] ≪사쿠라훈민정음≫, 이윤옥, 인물과사상사 ▲ ≪사쿠라훈민정음≫ 책표지 ⓒ인물과사상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서정쇄신은 ‘여러 방면에서 정치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정치의 계절이 오면 이 말은 여러 곳에서 더욱 날개 돋친 듯 쓰인다. 정확한 어휘로 기사를 작성하고 내보내야 하는 신문 같은 매체에서도 서정쇄신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서정쇄신이 우리 겨레를 개조시키려 한 일제강점기 미나미 지로 총독의 ‘조선통치 5대 목표’였음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위 글은 《사쿠라훈민정음》 책에서 인용한 글귀다. 올해는 나라를 빼앗겼던 국치 100돌이고 나라를 되찾은 지 벌써 65년이 된 해인데 아직도 우리의 일본말찌꺼기 청산은 요원하기만 하다. 고대 야마토시절 자신들에게 고급문화를 가르쳐줬던 은혜의 나라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일제가 썼던 <서정쇄신>을 우리는 자존심도 버린 채 쓰고 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치인들이 더욱 많이 쓴다. 이런 잘못을 통렬히 꾸짖는 책이 나와 화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에서 오랫동안 일본어 교육에 전념하
조선왕조실록에는 주금(酒禁), 곧 금주령에 관한 내용이 무려 249건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술 마시기를 즐겼고, 이에 대한 폐단도 많았던가 봅니다. 금주령은 평상시에도 내리지만 특히 가뭄 등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성하는 뜻으로 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종 때에는 신하들이 금주령에 구애치 말고 기로연(耆老宴, 경로잔치)을 열자고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세종실록 39권, 10년(1428) 3월 24일 자 기록에 보면 금주령을 내리자는 황보인 등의 상소에 대하여 세종은 “내가 술을 들지 않고 금한다면 옳으나, 위에서는 금주하지 않으면서 다만 밑으로 백성만 못 마시게 한다면 이를 어기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며, 법적 다툼이 생겼을 때 번거로울 것이다. 더군다나 처벌을 가볍게 하고 금주령을 늦추는 것도 또한 가뭄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정책이다.”라고 하며 신하들의 금주령 주장에 반대합니다. 잘 지켜지지 않을 금주령을 내리면 오히려 벌 받는 사람만 많아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영조실록 23권, 5년(1729) 8월 20일에도 금주령을 거둬들이도록 한 사실도 있습니다. “검토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
“산조(散調)”는 한국 전통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의 한 장르입니다.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의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아쟁산조 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산조를 연주할 때는 장구의 반주가 필수적이며, 처음에는 느린 진양조로 시작하여 점차 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바뀌어 갑니다.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가 있고, 감미로운 가락과 처절한 애원조의 가락이 있지요. 산조(散調)는 말뜻 그대로 '허튼 가락', 또는 '흩은 가락'에서 유래한 것인데 산조 이전에 있었던 여러 민간 음악이 산조 속에 녹아 하나가 되었습니다. 연주장소, 연주자 등 연주조건에 따라 즉흥적인 감정표현을 중시하는 음악입니다. 산조는 전통 사회의 해체기에 생겨난 것으로 해체기의 "흐트러짐","불안함"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자연스런 개성미를 추구하여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해방감을 안겨준 곧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민중음악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산조는 짧게는 15분, 길게는 60분을 넘기기도 하지요. 특히 산조는 이른바, “구전심수(口傳心受)” 곧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는 방법으로 가르침이 이어졌습니다. 선생이 한가락을 하면
근정전(勤政殿)은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하던 곳으로, 1395년(태조 4)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 건물은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것인데 현존하는 최대 목조건축물이지요. 또 경회루는 경복궁 주변에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고 이를 바라볼 수 있도록 1412년(태종 12)에 세운 것입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경회루는 화려한 단청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울 때 더욱 아름다운데 연못에서는 예전에 뱃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근정전(국보 223호), 경회루(국보 224호) 등이 G20(주요20개국) 서울 정상회의를 맞아 오늘까지 야간 개방합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을 일반인들이 밤 10시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1395년 궁 창건 이래 처음입니다. 밤 벚꽃놀이를 위해 1969년엔 8시까지, 1976년에는 9시까지 개방된 적이 있었습니다.문화재청은 이를 위해 광화문과 근정전, 경회루에 이르는 경복궁 주변을 아름다운 불빛으로 밝혀주고 있지요. 경복궁 개방기간 동안 저녁 7~8시 덕수궁 정관헌에서는 G20 기념 야간 국악공연인 '천하명인 덕수궁 풍
세종 때 정초(鄭招)·변효문(卞孝文)이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찾아서 쓴 것으로 그동안 중국에만 의존했던 농사에서 벗 어난 획기적인 농업서입니다. 나라의 뿌리인 농사가 생산력이 현저히 낮아지자 백성의 생활은 날로 궁핍해졌는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세종임금은 고민 끝에 이런 현상이 조선 풍토에 맞는 농사법이 없어서임을 깨닫고 마침내 각 지방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농민들에게 그들의 농법을 물어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 농사직설의 시초입니다. 책 내용을 보면 비곡종(備穀種 : 종자의 선택과 저장법) 지경(地耕 : 논밭갈이법)이 있는가 하면 삼ㆍ벼ㆍ기장·조·수수ㆍ피ㆍ콩ㆍ팥ㆍ녹두ㆍ보리ㆍ밀ㆍ참깨ㆍ메밀 등의 재배법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볍씨 뿌리는 법을 보면 당시 4가지 농법 곧 논에 볍씨를 뿌려 그대로 키우는 방식인 직파법(直播法), 밭벼처럼 파종하여 키우다가 장마 이후로 물을 담은 채 논벼로 기르는 방법인 건답법(乾畓法),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논에 옮겨 심어 재배하는 묘종법(苗種法), 그리고 밭벼를 기르는 산도법(山稻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농지 고르기(整地法)는 봄, 여름에 얕게 갈고, 가을에는 깊게 갈 것을 권했고, 거
동학농민혁명은 현재진행형, 어떻게 완결해낼까? [서평] 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 소통하는 우리 역사, 조광환 ▲ 책 표지 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 소통하는 우리 역사 표지 ⓒ 살림터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와 함께 했으나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꾀할 바 없다 백성을 사랑한 정의에 내 잘못은 없건마는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 누가 알까." 위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에 우뚝 섰던 전봉준 장군이 죽기 직전 남긴 시이다. 전봉준은 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무엇 때문에 의연히 죽어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수십만 농민은 무엇 때문에 또 다른 전봉준이 되었을까?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18세기. 수탈받던 농민들이 일어나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며 대규모 민중항쟁을 벌였는데 이는 곧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책은 그동안 많이 나왔는데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책이 나왔다. 바로 조광환이 발로 쓴 동학농민혁명 소통하는 우리 역사(살림터)가 그 책이
“호조(戶曹)와 사헌부(司憲府)·한성부(漢城府)에 명을 내리기를, ‘지금 큰 가뭄에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는데, 듣자니 여염(閭閻)의 우물을 간혹 차지하여 제 것을 삼고, 남이 물을 긷는 것을 금하며, 심한 자는 값을 받고 물을 팔아 장사를 하여,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고 하니, 그것을 엄히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위 글은 성종 17권, 3년(1472년) 4월 27일 자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물면 인심도 흉흉하여 봉이 김선달처럼 우물물을 팔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왕조실록에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물에 황룡(黃龍)이 나타났다고도 하고, 금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가 벌 받은 중도 있었다고 전하지요. 그런가 하면 이수광이 쓴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1591년 평양감사 권징이 몇 길이나 땅을 팠지만 물이 나오지 않고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뚫자 물이 나왔는데 그 물에서 붕어와 연밥이 나왔다고 합니다. 또 평양은 땅 모양이 배처럼 생겨 우물을 파지 말라고 한 그 말을 어겼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