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가는 부유햇드래도 시가는 빈한하닛가 우리 집에 가먼 반듯이 호미자루를 잡고 밧고랑에 나가야 할 것이요. 2. 가난한 집에라도 가난한 그대로의 가풍과 사정이 따로 잇는 것이닛가. 그것을 잘 알어서 맞추어 나가야 할 것. 3. 셋재는 나는 한평생을 집구석 방속에 가만히 부터잇슬 사람이 안이요 집과 처자를 던저두고 밧그로 도라단일 때가 만흘 것이니 그것을 각오하여야 한다하고 다짐을 밧엇슴니다.” 위 내용은 일제강점기 월간문학잡지 ≪별건곤(別乾坤)≫ 제16ㆍ17호(1928년 12월 1일 발행)의 “명사숙녀결혼초야의 첫 부탁, 첫날밤에 무엇을 말햇나” 가운데 조재호(曹在浩)라는 사람이 쓴 “참말로 첫날밤에”라는 글 일부입니다. 결혼 첫날밤에 무슨 말을 했는가에 대한 설문조사에 대해 가난한 신랑 조재호가 했다는 말이지요. 조재호는 부잣집에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뒤에 그 부잣집이 다시 청혼을 해오자 위와 같이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중매들어온 다른 혼처는 싫고 처음 얘기된 자신에게만 마음이 뺏겼음을 알고 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지요. ‘가난한 집이라도 가풍’이 있다는 말은 당당한 말이지만 ‘처자를 두고 밖으로 돌아다닐 일이 많다’는 선언은 지금 같으면
“차인표, 신애라 부부 연예계에서 잉꼬부부로 통하죠. 참 부러워요. 요즘 시대에 이렇게 열심히 기부하고 재미있게 사는 부부들이 얼마나 될까요? 참 배울게 많은 부부 같아요.” 다음에 어떤 누리꾼이 올린 글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잉꼬를 금실부부의 대명사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잉꼬(いんこ, 鸚哥)”는 일본말로 ‘앵무새’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앵무새’는 남의 말만 흉내 내는 새라는 ‘별로 안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잉꼬’라고 부를 때는 왠지 ‘잉꼬부부’ 같은 말을 떠올려 좋은 이미지로 둔갑하지요. 속사정은 잉꼬=앵무새인데 말입니다. 고려시대의 학자 이인로의 시 내정사비유감(內庭寫批有感)에는 "공작 병풍 그윽한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하고 / 원앙새 잠든 모습 행복한데 어찌 헤어져 날으랴 / 스스로 불쌍하구나, 초췌한 푸른집의 처녀가 / 언제나 남을 위해 시집갈 옷만 지어 주는 처지임을"처럼 원앙이 나옵니다. 그처럼 원앙은 문학 작품이나 그림에 자주 등장하고 신혼부부의 베개에 수놓을 만큼 예부터 우리 겨레가 예부터 부부금실을 상징했던 것은 잉꼬 곧 앵무가 아니라 원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관보 제 13536호(97.2.15)의‘일본어투 생
중국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입니다. 그런데 그 연변은 조선족이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는 강한 의식 덕분에 한글과 한복을 지키려는 노력이 대단합니다. 길거리 간판은 한글을 먼저 쓴 다음 한자를 쓰고 있으며, 시청 등 민원실 공무원들과 호텔 종업원들이 한복을 입고 근무합니다. 그런 연변에 견주면 우리나라는 한복을 입는 사람이 특이하게 보이고, 길거리 간판은 알파벳을 먼저 쓰거나 아예 알파벳으로만 표기하는 곳이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심의 번화가는 마치 뉴욕에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에 취하여≫, ≪그 사람을 읽다≫ 등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 허홍구 선생은 세종문화회관 옆에 있는 커피점 스타벅스에 여러 차례 찾아가 연변의 예를 들며 간판 표기를 한글로 바꿀 것을 권했습니다. 그 정성에 감복한 스타벅스는 결국 “스타벅스”를 한글로 표기한 간판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이제 온 나라의 스타벅스점이 이처럼 한글을 앞에 쓰고 알파벳을 뒤에 썼으면 좋겠습니다. 차 한잔을 마셔도 예사로 마시지 않고 우리말 사랑을 실천한 허홍구 시인님의 우리말 사랑에 손뼉을 보냅니다.
“역질을 쫓기 위하여 포(砲)를 쏘는 것은 벽사(邪) 하는 것이니, 어찌 세시(歲時)에만 할 것인가. 사시(四時) 개화(改化) 할 때에도 아울러 행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역질을 쫓는 사람의 복색은 봄에는 푸르게, 여름에는 붉게, 가을에는 희게, 겨울에는 검게 절후에 따라 바꿔 입게 하되, 세시에는 네 가지 색깔을 같이 쓰게 하라. ” 위는 연산군일기 60권, 11년(1505) 12월 24일 기록입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청명(淸明)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했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화(賜火)" 말고 “개화(改火)”라는 행사도 있었습니다. 개화는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계절마다 불을 새로 만들어 쓰면 음양의 기운이 순조롭게 되고 질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내병조(內兵曹, 병조에 딸린 관청)와 각 지방 관청에서는 해마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과, 토왕일(土旺日: 입추 전 18일 동안)에 나무를 비벼 새 불을 만들어 각 궁(宮)에 보냈으며, 모든 대신의 집에도 나누어주었습니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위는 송강 정철의 한밤중 산 속의 절에서(山寺夜吟:산사야음)입니다. 나뭇잎 지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하여 동자승에게 나가보라고 했더니 밖에 나가본 동자승은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렸네요.”라고 다소 엉뚱한 답을 하지만 쓸쓸한 가을밤 후두둑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는 서서히 다가오는 겨울을 연상케 합니다. 예부터 겨울의 길목을 입동이라 불렀습니다. 7일은 24절기의 열아홉 번째인 입동(立冬)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드는 때지요. 이때쯤이면 가을걷이도 끝나 바쁜 일손을 놓고 한숨 돌리고 싶을 텐데 곧바로 닥쳐올 겨울 채비 때문에 또 바빠집니다. 입동 전후에 가장 큰일은 역시 김장입니다. 지금은 배추를 비롯한 각종 채소를 365일 팔고 있고 김치 말고도 먹거리가 풍요롭지만 예전에 겨울 반찬은 김치가 전부이다시피 했으며 김장 담그기는 우리 겨레의 주요 행사로 그 전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입동 전후 시골에서는 품앗이로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김장용 배추를 씻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
[민족예술공연단 공연 동행 취재기 4] 함부르크 여행기 김영조 (sol119) ▲ 함부르크 주요부 지도(시청사, 번화가, 300년 넘은 창고 건물들, 성미카엘 교회들이 표시되었다.) ⓒ 김영조일행이 민족예술공연을 하기 위해 함부르크를 찾은 건 6월 3일 저녁이었다. 함부르크한인교회의 배려로 민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우리가 민박한 곳은 독일인과 결혼한 교포의 집이었는데 그 부부는 내게 감동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더구나 리허설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내게 함부르크 여행을 먼저 제안하는 고마움을 주었다. 함부르크(Hamburg)는 독일 북부에 있는 넓이 755㎢에 인구 180만 명의 도시이며 항구와 국제공항이 있는 유럽의 교통 요지이다. 정식 이름은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로 베를린 다음 가는 제2의 도시이다. 811년 카를 대제가 알스터강(江)이 엘베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하마부르크성(城)’을 쌓은 것이 시의 기원이다. 함부르크에 한국영사관이 들어선 것은 1883년이다. 일요일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차를 타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운전은 남편인 데이트메어씨 차지다. 비싼 운전사를 공짜로 고용한 것이다. 그는 운전하면서 새로운 건물이나 상황이 나
우리 겨레는 예전 한겨울 추위를 누비옷으로도 견뎠습니다. 누비는 원래 몽골의 고비 사막 일대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200년쯤 중국과 티베트에서 쓰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엔 치마, 저고리, 포, 바지, 두의(頭衣), 신발, 버선. 띠 등 옷가지와 이불에 따위에 누비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누비는 보통 보온을 위해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함께 홈질해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입니다. 그냥 솜옷은 옷을 입을수록 옷감 안에서 솜이 뭉쳐버립니다. 하지만, 누비를 해놓으면 이렇게 뭉치는 일도 없고, 누비 사이에 공기를 품고 있어서 더 따뜻한 것이지요. 누비는 바늘땀 간격이 보통 0.3㎝, 0.5㎝, 1.0㎝로 나뉘는 섬세한 작업인 만큼 정성을 쏟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비옷은 아이들 옷이라도 한 달은 걸려야 한다고 하지요. 누비는 무늬의 모양에 따라 줄누비, 잔누비, 오목누비 따위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홈집이 촘촘한 잔누비는 홈질줄의 간격이 1밀리미터 정도인데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본래는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넝마의 헝겊 조각을 누덕누덕 기워서(納) 만든 옷(衣) 곧 `납의장삼(納衣長衫)`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납의가
“시험으로 먹어 본다는 것이 한그릇 두그릇 먹기 시작을 하면 누구나 자미를 드려서 집에 갈 로자 돈이나 자긔 마누라의 치마감 사줄 돈이라도 안이 사먹고는 견듸지 못할 것이다. 갑이 눅은 것도 눅은 것이어니와 맛으로던지 영양으로던지 상당한 가치가 잇는 것이다. 自來로 서울의 폐병(肺病)쟁이와 중병 알코 난 사람들이 이것을 먹고 소복(蘇復, 원기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래(近來)에 소위 신식결혼을 하얏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넝탕이 안이면 조석(朝夕, 아침저녁)을 굴물 지경이다.” 위는 일제강점기의 잡지 ≪별건곤≫ 제23호(1929년 발행) “경성명물집(京城名物集)”에 나오는 설렁탕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서는 이렇게 설렁탕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지요. 설렁탕을 사전에서는 “소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고 푹 끓인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이라고 짧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소머리·사골·도가니 그 밖에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따위를 재료로 써서 10여 시간 푹 고면 뽀얀 우유빛 색깔의 국물이 군침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것은 살코기만을 넣고 끓인 국과는 달리 깊고 진한 맛이 특징입니다. 사전적인 풀이와 달리 설렁탕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소주를 마신다 / 슬픔을 타서 소주를 마신다 / 사랑을 되새기며 소주를 마신다 / 배신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인생을 풀어 놓고 / 고통을 참아가며 / 저주와 능멸을 버리기 위하여 /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가슴을 열고 환희와 행복을 / 찾기 위하여 소주를 마신다.” 소주 / 성기조 우리가 흔히 소주(燒酒)라고 하는 것은 노주(露酒)·화주(火酒)·한주(汗酒)·백주(白酒)·기주(氣酒)라고도 하는데 증류주와 희석주로 크게 나눕니다. 이중 증류주는 소줏고리라는 증류기로 증류한 제품이며, 특이한 향을 강하게 풍기지요. 또 소규모로 빚는 술로 예로부터 널리 마셔왔습니다. 일반 양조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오래 두면 대개 식초가 되거나 부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점을 없애려고 만든 것이 증류식 소주입니다. 현재 전통주의 맥을 이어오는 안동소주·개성소주·진도홍주·제주민속주 등이 그것이지요.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증류법이 원(元) 나라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서 발전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희석식은 고구마나 타피오카 등의 원료를 발효시켜 정제한 주정(에틸알코올)에 물, 조미료, 향료 등을 섞어서 35% 이하로 희석
날씨가 쌀쌀해지면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워집니다. 달고 신맛이 나며 향기가 그윽한 모과차는 추운 계절에 제격이지요.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처럼 생김새는 울퉁불퉁 곱지 않지만 그 향에 반해 사람들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과일이 모과(木瓜)입니다. 선조실록 112권, 32년(1599) 윤4월 26일 1번째에 “도제조 이항복 등이 임금의 건강을 근심하여 아뢰기를 ‘삼가 전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옥체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았는데 놀랍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병의 뿌리가 오래되었으니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병세가 오래갈까 걱정됩니다.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가 진맥하게 한 뒤 약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삼령백출산(蔘白朮散)에 건갈(乾葛)·맥문동(麥門冬)·모과(木果)·오미자(五味子)를 가미하여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지어 들이라고 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모과를 설명하기를 “성질이 따뜻하고[性溫], 맛이 시며[味酸], 독이 없다[無毒]. 토사곽란을 다스리며, 음식을 소화시킨다. 또 이질을 앓은 뒤의 설사증상, 구역질, 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