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나의 학해(學海, 학문의 바다) 여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나아갈 길을 지도해 주신 스승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그중에서 나에게 결정적 방향을 지시하였고, 따라 나의 추모의 정한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스승님은 조선 청년이 누구든지 다 잘 아는 근대 조선어학 최대의 공로자인 한힌샘 주시경 씨이다. (중략) 오늘날 같으면 조선어 선생도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지마는 그 당시에는 주 선생 한 분뿐이다. 커단 책보를 끼고서 조그만 오두막집을 나서면 동분서주하여 쉴 사이가 없었다. 안동 네거리에서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깜빡 잊어버리고 헤매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위는 잡지 <조광> 1936년 1월호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의 은인 주시경 선생"이란 글 일부분입니다. 모레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드신 지 제564돌 되는 한글날이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한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글의 정착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 외솔 선생께서 한글을 옳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 선생님의 덕이었다는 글이 윗글이지요. 한힌샘 주시경(1876 ~ 1914) 선
올해는 국치 100년, 해방 65돌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러나 우리 말 속에는 일본말찌꺼기가 여전히 남아있어 자라나는 세대에 부끄럽습니다. 더 부끄러운 것은 어느말이 일본말이고 어느말이 토박이 말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매주수요일자 얼레빗에 일본이야기를 써 주시는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님께서 우리말 속에 남아있는 일본말찌꺼기를낱낱이 캐내 말밑을 밝혀 실어주실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우리부터라도일본말찌꺼기를 청산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글에대한 문의는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해주십시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일본에 닥구앙, 나쓰께, 하구사이쓰께들은 말할 것도 업시 우리네의 김치에는 족달불급임니다. 위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김치 맛을 본 후에는 귀국할 생각조차 업서진다니 더 말할 것도 업고 서양 사람들도 대개는 맛만 보면 미치는 것이 나는 서양 음식을 먹고 그러케 미처보지 못한 것에 비하면 아마도 세계 어느 나라 음식 가운데에든지 우리 나라 김치는 조곰도 손색이 업슬 뿐 안이오 나의게 물을 것 가트면 세게 뎨일이라고 하겟슴니다.” 위 글은 일제강점기 때의 잡지 ≪별건곤≫ 제12·13호(1928년 05월 01일 발행, 조선의 자랑호)에 실렸던 시인 류춘섭의 “조선 김치 예찬”이란 글 일부입니다. 또 같은 잡지에서 “중국 음식은 육류가 너무 만히 들어서 먹은 후에 구미가 청신(淸新)치 못할 때에 제일 사모되기는 배추김치와 고초장이엇슴니다.”라고 털어놓습니다. 그밖에 신형숙, 이정섭, 손진태, 김준연, 유영준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외국에 가서 생각나던 조선의 음식’이 김치였다고 고백했지요. 아마 현대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은 김치일 것입니다. 요즘 김치 파동이 일어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고 부른다는데 그래도 김치를 안 먹을 수 있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 /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이 시는 조선 전기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시로 그는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라고 당부했습니다. 17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던 탓에 51살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후 사헌부 감찰로 시작하여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는데, 이러한 관직생활은 무려 17년의 긴 세월 동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정책의 잘못을 보면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비판하였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때문이었지요. 외척의 전횡이나 대신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잊지 않았는데 그러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 말년에는 3차례나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설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의 인격을 흠모하던 사람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동료와 죽음을 함께하지 못
예전 우리네는 놋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상에 올렸었습니다. 또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혼담이 이루어질 때 상대 집의 놋그릇이 얼마나 구색을 잘 갖추고 있는지와 얼마나 잘 닦아 놓는지를 확인한 뒤에 혼사를 결정하였다는 말이 있지요. 놋쇠는 수저와 밥그릇은 물론 제기(祭器), 징·꽹과리도 만들고 혼수 품목의 하나인 대야와 요강도 만들었습니다. 놋그릇 특히 방짜유기는 구리 78%에 주석 22%를 합금한 것으로 최소 11명이 함께 수백 번씩 망치로 두드려서 만듭니다.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어서 휘어지거나 깨지지 않고, 다른 유기에 비해 광택이 뛰어나서 예로부터 방짜유기는 인기가 있었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놋쇠가 식중독균을 99.9%나 없앤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놋그릇을 쓰면 미나리 속 거머리도 없애고 놋숟가락은 음식에 독을 확인하는데도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또 스님들이 머리카락을 자를 때 꼭 방짜로 만든 가위를 쓰는데 만일 머리를 베이더라도 상처가 덧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 위로 하얀 서리가 덮인, 팔순을 넘긴 할머니가 주인 잃은 할아버지 놋그릇을 소중히 닦는 것은 희미하게 잊혀 가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과 그리움을 그 안에 담아내 것
경복궁에는 경회루 남문 서쪽에, 창덕궁에는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 있었던 내반원(內班院)은 내시(內侍)들의 집무실이었습니다. 그 내시들은 사극에서 구부정한 어깨에 어정쩡한 걸음걸이 그리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인물로 많이 묘사됩니다. 하지만, 내시는 알고 보면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지요. 물론 궁궐 안 청소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내시도 있었지만 정치까지도 깊숙이 끼어들었던 내시들도 있었습니다. 또 궁중 안의 음식을 두루 감독하는 대내감선,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명, 궁중의 문을 지키는 수문 등도 내시의 업무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궁중 제사, 왕실의 재산 관리, 궁궐 안 여러 공사 감독, 궁녀의 감독 등 내시들이 맡아서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이 가운데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이 내시부의 으뜸 벼슬이었지요.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내시는 조선시대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140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시가 되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사내구실을 못한 아이들이거나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내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시는 신분 상승을 할 좋은 기회였고,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
전림(田霖, ?~1509)은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법도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청백리로 한평생을 살다간 공직자입니다.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오는데 전림이 한성부판윤으로 있을 때 왕자 회산군의 집 짓는 곳을 지나가다가 짓는 집의 규모가 큰 것을 보고 공사감독을 불러 야단칩니다. 후에 가서 보니 전림의 말을 듣고 기둥을 자르고 칸 수를 줄인 결과 회산군 집은 납작하고 홀쭉해져서 그만 '납작집’이라고 불릴 만큼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조의 공신으로 세도를 누리고 있던 홍윤성(洪允成)의 하인들이 그 세도를 믿고 장안에서 횡포를 부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림은 나졸들을 매복시켜 그 하인들을 잡아들입니다. 주인의 힘을 믿은 하인들이 "누가 감히 홍정승 집 사람들을 잡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쳤지만 오히려 전림이 "홍정승이 너희에게 범법하라고 명하셨느냐?"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홍정승도 감히 어쩌지 못했지요. 오히려 "공과 같은 사회기강을 바로잡는 포도대장이 있기에 사람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슬 퍼런 기강을 간직하던 전림은 아들이 횡포를 부리자 죽이고 마는데 지나치긴 하지만 비록 자식일
일제강점기는 35년이 아니라 8년이다 [서평] ≪대한민국임시정부 바로 알기≫, 이봉원, 정인출판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27년간 독립운동을 해왔습니다. 독립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대한 민족이 불요불굴의 정신과 일본 제국주의에 결코 투항하지 않겠다는 정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외 중국에서 하루라도 존재할 수 있었고 분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이 시종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지요.” 위는 대만국립정치대학 후춘혜 교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의에 대해 말한 것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이봉원 회장(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이 정인출판사(대표 정봉선)을 통해 펴낸 책 ≪대한민국임시정부 바로 알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엔 분명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되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 난 4월 11일은 제91돌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날이 아닌 4월 13 일에 기념식을 치룰 만큼 임시정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 까닭은 아직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책이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데 이번 임시정부 수립
민요 공연, 이렇게 청중을 사로잡아라! 경기민요를 새롭게 도약시킨 이희문 공연 경기민요(京畿民謠)는 서울·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민요인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예능보유자는 이은주, 이춘희 선생이다. 흔히 불리는 소리는 노랫가락·창부타령·아리랑·이별가·청춘가·도라지타령·노들강변·방아타령·군밤타령·풍년가·한강수타령·경복궁타령·개성난봉가·늴리리야 등이 있다. 서도민요나 전라 민요에 비하여 맑고 깨끗하며, 경쾌하고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간 경기민요는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옛것을 그대로 지켜내는데 머무르지 않고 “법고창신(法古蒼新)”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뜻 깊은 공연이 있어 주목을 받았다. 지난 7월 17, 18일 이틀 동안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황제, 희문을 듣다”가 그 공연으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 ▲“황제, 희문을 듣다” 공연 소책자 사진 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법고창신 정신 을 제대로 살린 근래에 보기 드문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가 청중 사이에서 쏟아졌다. 이 공연은 “희문 트레디셔널엔터테인먼트”가 주최하고, (재)한국전통
우리 향토소리를 알고 싶으면 이 음반을 들어라! 한국민요연구회 ‘관현악과 함께하는 지역향토소리’ 음반 펴내 “이 방아가 웬 방아냐 / 아래 윗녘에 경상방아 / 여주이천에 자차방아 / 김포통진은 밀다리방아 / 날구장천 찧어도 헛방아 뿐이로구나 찧어라 쿵쿵 / 방아를 쪄라 / 얼른 찧고 님 마중 갈 제 / 쌀방아 찧어서 백설기요 / 보리방아 찧어서 개떡이면 / 찰방아 맷방아 찧어서 에루화 찰떡이로구나.” 위 노래는 우리의 민요 “경기도 고양 방아타령” 일부 대목이다, 민요는 지방마다 독특한 언어인 사투 리가 어우러져 민중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노래이다. 민중들은 민요를 통해 세상의 근심이나 노동의 시름을 덜기도 했으며, 이를 건강하게 극복해냈다. 수천 년이 넘게 입에서 입으로 전승돼 온 우리의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건 기록보다 더 큰 구전의 힘이었으나, 이젠 이 구전도 거의 끊겨 향토민요 보존 작업이 시급해졌다. 이에 사단법인 한국민요연구회(이사장 김혜란)는 지난 2006년부터 지역 향토소리 가운데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이를 전문적인 민요 명창들이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하여 무대에서 발표 공연함으로써 향토민요가 문화적 정서에 깊숙이 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