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비의 추쇄를 쇄관(刷官, 노비를 잡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벼슬아치)에게 맡기지 않고 영읍(營邑, 군영과 고을)에다 넘긴 것은 내가 즉위할 때 내린 법령이었다. 더구나 올해는 추쇄를 정한 연한이다. 조사하여 충당하고 면제할 때 전일의 쌓인 폐단과 고질적인 폐막을 한번 쇄신시키면 정말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감사가 수령들에게 떠넘기고 수령들은 하리(하급 관리)들에게 일임하여 옛날처럼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를 하여 도리어 침해가 심해진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위는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년) 11월 3일 기록으로 ‘추쇄(推刷,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여 도망친 노비를 잡아 원래의 주인이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위 기록처럼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따라 모두 고된 노역이나 과중한 신공(身貢, 노역 대신에 납부하는 공물)의 부담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고 이에 따라 나라에서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해 추쇄사업을 벌였습니다. 지난 2010년 KBS2TV에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장(청장 허민)은 조선시대 불교 건축과 절 운영의 변화를 보여주는 「안동 광흥사 응진전(安東 廣興寺 應眞殿)」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하였다. 안동 광흥사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특히 조선전기에 불경 간행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안동지역의 유서 깊은 절이다. 「안동 광흥사 응진전」은 창건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나, 망와*에 기록된 글을 통해 1647년(인조 25년) 기와 공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어, 그 이전인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27년과 1946년 절에 난 큰 불로 주불전이었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탔으나, 응진전은 중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 화를 면한 뒤 사실상 광흥사의 중심 불전 기능을 수행하게 된 보기 드문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 망와: 지붕 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 기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정면의 공포*는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다포 형식으로 화려하게 조성되었으며, 옆면과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고, 꽃 무늬가 그려진 화반*으로 장식하여 정면을 강조하였다. * 공포: 기둥머리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현재 전하는 경수연도(장수 축하ㆍ기원 잔치인 경수연을 그린 그림) 가운데 유일한 원본인 「신중엄경수도첩」을 비롯해 「영산회상도」,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제10권하」, 「묘법연화경 권3」, 「구례 화엄사 동종」, 「고려 수월관음보살도」, 「‘영축사’명 영산회상도」를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각각 지정 예고하였다. 고령신씨영성군파 문중에 전해오는 「신중엄경수도첩(申仲淹慶壽圖帖)」은 1601년 80살이 된 신중엄(申仲淹, 1522~1604년)의 아들 신식(申湜)과 신설(申渫)이 아버지의 장수를 축하하며 개최한 경수연을 기려 만든서화첩이다. 경수연은 1601년 12월 12일 처음 연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열렸다. 이 잔치는 서대문 인동(仁洞)에 위치한 신중엄의 자택에서 열렸는데, 당대의 주요 관원과 명문장가, 명필가 등이 참석하였다. 신중엄경수도첩에는 맨 앞에 허목의 전서*체 글씨 <경수미정(慶壽眉鼎)>ㆍ<경수도첩(慶壽圖帖)>이 쓰여 있으며, 화공(畫工)에게 부탁해 그린 <경수연도(慶壽宴圖)>ㆍ<서문구모도(西門舊茅圖)>ㆍ<용산강정도(龍山江亭圖)>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