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영주 양인선 기자] 무섬마을의 명물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발밑에 흐르는 잔잔한 물속을 보니 피라미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혼자 걷기 딱 좋은 외나무다리는 마주 건너 오는 사람이 있을 때는 살며시 한쪽에 비껴 서야 한다. 자칫하면 물속으로 떨어질 것 같아 등줄기에 땀이 난다. 지금 사람들은 재미삼아 이 다리를 건너지만 예전에 무섬마을 사람들은 장보러 갈 때, 강건넛마을로 농사지으러 갈 때, 혼례를 치룰 때, 상여를 메고 나갈 때 등등 이 외나무다리와 동고동락하며 살았다. 무섬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관광객들은 일부러 이 다리를 걸어보며 당시 마을사람들의 심정이 되어 본다. 어제(14일) 영주에 친지 혼례가 있어 내려가는 길에 가을 정취도 느껴 볼겸 기자는 하루 전날인 그제 영주 무섬마을을 찾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던 외나무다리도 건너보고 전통가옥에서 하룻밤을 묵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수하고 느린 영주 사투리를 쓰는 민박집 할머니의 후한 인심도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정감이다. 냇가라고하기에는 너무 큰 내성천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무섬마을은 새벽안개가 일품이었다. 안개가 채 걷히기 전 일찍 일어나 기와집이 잘 보존된 마을길을 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섬학교에서 이번 가거도 여행의 제목을 <일생에 꼭 한번은 가봐야 할 섬, 국경의 섬>이라고 한 것에 끌렸는지, 섬학교 교장 강제윤 시인의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가거도 여행을 신청하여 모두 39명이 버스를 타고 갑니다. 39명 중 가거도를 가 본 사람은 저와 교장 선생님밖에 없습니다. 제 주위에도 가거도 가 본 사람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가거도가 어디 있는 섬이냐?’고 묻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만큼 가거도는 우리에게는 머나 먼 섬이었지요. 오죽 했으면 가거도가 “자기도 사람이 거할 만한 섬, 가거도(可居島)”라고 목청을 높였겠습니까? 가거도 가는 배가 아침 8시 10분에 목포항을 출발하니, 섬학교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서울에서 밤 12시에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잠은 버스 안에서 자야했고, 참으로 피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를 배를 타고 가거도 가는 동안이 문제였습니다. 매가 출발하여 처음에는 호수 같이 잔잔하던 바다가 비금도, 도초도 벗어나니 조금씩 파도 높이를 더합니다. 그리고 흑산도를 지나 서남쪽으로 선수를 틀어 일로 가거도를 향해 달릴 때에는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배를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꽃 피는 봄, 움츠린 어깨를 펴고 한강의 대표적인 역사와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하고, 공부하는 「한강 역사탐방 프로그램」과 함께 한강 곳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울시(한강사업본부)는 우리 민족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한강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쉽고 재밌게 알리기 위해 한강과 그 주변 역사문화유적지를 연계한 「한강 역사탐방 프로그램」13대 코스를 4월 5일(수)부터 11월 30일(목)까지 운영한다. 「한강 역사탐방 프로그램」은 ▲도보코스 와 ▲선상코스 로 운영되며, 전문 해설사가 동반하여 한강 관련 역사, 문화 및 인물에 관해 해설을 진행하고, 참여자가 한강 및 주변 문화유적지를 직접 찾아보고 탐방하는 체험형 프로그램으로, 무료로 진행된다. 코스의 성격에 따라 개인 또는 단체 접수로 나뉘며, 예약접수는 4월 4일(화)부터 시작해 운영기간 내(4월 15일~11월 30일) 언제라도 신청 가능하다. ‘도보코스’(1코스 광나루길~12코스 겸재정선길)는 개인 및 단체참여 모두 신청가능하며, ‘선상코스(한강 옛 나루터길)’는 학교단체만 신청 가능하다. 외국인 도보코스 신청자는 원하는 경우, 영어 또는 일어로 역사문화 관광 해설이 가능하다. 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교육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다. 또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스님으로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우뚝 섰던 만해 한용운의 흔적은 인제 만해마을과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등이 있지만 뜻밖에 남한산성에서도 만났다. 바로 남한산성만해기념관이 그곳인데 만해사상연구가인 신구대 전보삼 교수가 자료수집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웠다. 건국공로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과 만해 생전의 각종 저술과 유물, 3·1운동 당시 만해의 옥중투쟁을 보여주는 신문자료, 희귀본인 「님의 침묵」 초간본 및 100여 종의 「님의 침묵」이본과 만해관련 연구서 등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뜻을 세우다”, “불교인으로의 지향”, “3ㆍ1운동의 선봉에 서서”, “침묵의 미학”, “설중매화”, “심우장의 정절”, “만해가 떠난 그 후” 따위로 나누어 그의 삶을 정리했다. 주욱 이 순서대로 사진과 설명글을 더듬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봄이 성큼 다가온 지난 3월 25~26일, 국토사랑방 답사단을 따라 1박 2일 일정으로 아름다운 섬 청산도에 다녀왔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섬으로 완도항에서 뱃길로 50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경관이 유난히 아름다워 예로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 또는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아름답다하여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 부르기도 하는 섬이다. 푸른 바다, 푸른 산, 구들장 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청산도는 2007년에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여유마을)’로 지정되어 유명해졌다. 청산도 ‘슬로길’은 청산도 주민들이 마을 간 이동로로 이용하던 길로써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하여 슬로길이라 이름 붙여졌다. 청산도 슬로길은 2010년 전체 11코스 42km에 이르는 길이 열렸는데, 2011년 국제슬로시티연맹 공식인증 ‘세계 슬로길 제1호’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길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슬로길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slow’라는 영어에 ‘길’이라는 우리말을 붙여서 ‘슬로길’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든 것
[우리문화신문= 일본 사이타마 이윤옥 기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신사(神社) 경영이 어려워 아버지는 교사 직업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게 1975년 무렵입니다. 이후 아버지는 교직을 사직하고 궁사(司宮, 구우지) 일에만 전념하게 되지요. 여러분이 고마역(高麗驛, 고구려를 고마라고 발음)에 내렸을 때 광장에 빨간 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거기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쓴 것은 아버지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쓴 글씨는 아닐 겁니다. 병환 중에 쓰신 글씨였거든요." 고마신사(高麗神社, 고마진자)의 제60대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씨는 대담을 위해 찾아간 기자 일행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장승에 새겨진 글씨가 아버님의 글씨라고요? 아이고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보고 올 것을 그랬네요" 일행은 고마역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글씨가 누구의 글씨인지 몰랐다. 15일(일) 오전 11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埼玉県日高市)에 자리한 고마신사의 접견실에서는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 4명과 일본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도다 미쓰코(戶田光子) 씨 등 일본이 3명이 1시간 가까이 궁사(宮司)와 환담 시간을 가졌다. 고마신사를
[우리문화신문= 이바라키현 이윤옥 기자] "아니 이 돌비석에 고구려 혜관스님의 이야기가 써있단 말입니까?" 어렵사리 찾은 이바라키현 근본사의 가미하라(上原) 주지스님 (일본에서는 주직(住職, 쥬쇼쿠))은 멀리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되레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는 또 한다는 말이, "본당(대웅전)이 원래 이 자리가 아니었는데 본당을 세우면서 이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때 이 돌비석의 유래를 몰라 그냥 버리려다 이곳에 옮겨 온 것이지요." 아뿔사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주지스님한테 절의 유래를 들으러 갔다가 되레 기자가 주지스님에게 절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럴려고 멀고먼 한국에서 이바라키현 가시마시(茨城県 鹿嶋市)까지 낯선 길을 물어물어 찾아왔나 싶어 다소 실망감이 느껴졌다. 어제 10일(화), 기자는 근본사(根本寺, 곤뽄지) 를 찾아가기 위해 이른 아침 도쿄역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근본사가 자리한 가시마(鹿嶋 또는 鹿島)까지는 고속버스로 두어 시간 걸렸다. 가시마진궁역이 종점인 곳에 내려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 간신히 근본사에 도착한 기자는 인기척 없는 경내를 살피다가 본당 앞에 이끼 낀 돌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원래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만 한국에서 오신 기자를 위해 특별히 허용합니다. 하지만 유리문 밖에서 보셔야합니다." 어제 5일(목) 찾은 관세음신앙의 명소인 연화원 홍명사 (蓮華院弘明寺, 렌게인구묘지)의 미마츠간다이(美宋寬大) 부주지 스님은 기자를 본당(대웅전) 안쪽 깊숙이에 모셔져 있는 11면관세음보살상(줄여서 관세음상) 앞으로 안내했다. 높은 천정의 조명은 흐리지만 관세음상 앞에 켜둔 여러 개의 촛불이 서로 관세음상을 비추려는 듯 흔들거리며 밝기를 조절해주는 듯했다. 아! 이 불상이 1,300여 년 전 백제계 행기스님이 직접 만든 불상이라니 기자는 합장하여 예배했다. "행기스님이 만든 이 불상은 1도삼례(一刀三禮)로 만든 것입니다. 곧 칼집 한 번 내고 세 번 절하고, 칼집 한 번 내고 세 번 절하는 방식이지요.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 간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홍명사의 관음상은 관동지역에서도 그 형식이 아름답기로 으뜸입니다." 부주지 스님은 관음상을 우러러 보고 있는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역시 한국 최초 공개 불상이다.(기자는 군마현의 미즈사와절에 있는 고구려 혜관스님 상을 최초로 공개한바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기자] 성곡사(星谷寺, 쇼코쿠지)로 가기 위해 도쿄에서 특급으로 한 시간여 달려가 내린 자마역(座間驛)은 한적한 소도시 역이었다. 역에서 내려 길을 묻고자해도 지나는 행인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곳에 성곡사는 자리했다. 판동33소관음순례 제8번(坂東33所觀音巡禮第八番) 도량인 성곡사는 일본 최초로 대승정의 칭호를 받은 백제계 출신 행기(行基, 668~742)스님이 개산(開山)한 절이다. 행기스님은 백제왕의 후손으로 《겐코샤쿠쇼(元亨釋書)》에는 행기스님을 백제국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釋行基世姓高志氏。泉大鳥郡人。百濟國王之胤也。) 행기스님은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나라 야쿠시지(奈良 藥師寺)에서 신라승 혜기(慧基)와 백제계 의연(義淵)스님에게서 불도를 닦았으며 스물네 살에 덕광법사(德光法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덴표 17년(745)에 대승정 자리에 오른 일본의 고승이다. (초대승정은 고구려 혜관스님이고 행기스님은 이후 대승정으로 활약). 이후 민중 속에서 불교의 보살행을 실천하다 81살의 나이로 스가와라지(菅原寺)에서 입적한다. 나라시대 뛰어난 고승들이 많았지만 행기스님만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산 승려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 이윤옥기자] “1월 1일 오후 3시에 오시면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에 자리한 광은사(光恩寺, 고온지) 주지스님은 서울에서 누리편지(메일)를 보낸 기자에게 시간까지 정해주면서 찾아오라고 했다. 1월 1일은 일본 절에서 새해맞이(初詣, 하츠모우데) 로 한해 가운데가장 바쁜 때로 외부 손님과의 대담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스님은 흔쾌히 기자와의 약속을 해주었다. 광은사는 고구려 혜관스님이 개산(開山, 산문을 연다는 뜻으로 창건을 뜻함)한 절로 이카호의 수택사(미즈사와데라, 水澤寺), 이바라기현의 근본사(根本寺, 곤본지)와 함께 관동 지역의 3대 고찰 가운데 하나인천년 고찰이다.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주지스님을 찾아뵙겠다고 한 것이 죄송스런 일이긴 하지만 기자 역시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이 이때뿐인지라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낸 것이 가상했는지 광은사의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3시에 기자를 맞았다. 팔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모습의 주지스님은 검은 옷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기자를 만나자 마자 명함을 건네주었는데 광은사주직(光恩寺住職) 나가라쿄코(長柄行光)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례지만 연세는?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