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수(鼓手)의 임무나 그 역할에 관한 이야기, 고수는 반주자로 창자의 소리에 맞추어 정확하게 장단(長短), 곧 박자의 조합과 강약(强弱)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소리속을 훤히 꿰고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 조건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고수의 추임새가 소리판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고수가 정확하게 장단을 쳐 주고, 이와 함께 강약 처리를 잘한다고 해서 모두가 유명 고수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일까?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다. 그것은 바로 ‘얼씨구’, ‘으이’, ‘좋지’, ‘좋다’, ‘잘 헌다’ 등의 조흥사(助興詞), 곧 추임새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넣어 줌으로 해서 소리꾼에게 자신감을 가지도록 북돋아 주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를 소홀히 하거나 적절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고수들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명고수(名鼓手)의 대접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리꾼의 역할은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같은 긴 이야기를 소리와 장단, 그리고 다양한 대사와 발림(몸동작) 등으로 소리판을 이끌어가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수의 길로 들어선 송원조가 당시 이리국악원 총무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고법(鼓法)을 익히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의 북 실력이 점점 향상되면서 무대공연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익산에서 열린 판소리 대회, 북 부문에서도 장원에 올랐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고수(鼓手)의 임무나 그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소리꾼은 긴 이야기를 소리와 장단, 그리고 다양한 대사와 동작, 등으로 소리판을 끌어 나가는 역할을 하기에 매우 힘든 역할이고, 상대적으로 고수는 한 자리에 앉아서 소리에 맞추어 북을 치기 때문에 쉬운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첫째가 고수, 둘째가 명창이란 말, 곧 ‘일고수 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란 말이 널리 회자(膾炙)하는 것도 그만큼 고수의 역할이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대학신문에 “추임새, 에너지의 보충원(補充原)”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고수가 얼마나 어려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추임새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점을 피력했다, 비단 판소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3월 3일은, 일본 풍습으로 히나마츠리날(ひな祭り)이었다. 히나마츠리란 딸아이를 위한 잔칫날로 히나인형을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는 뜻에서 히나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은 혹시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지만 지금은 다른 명절처럼 양력으로 지낸다. 히나인형은 원래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3월 3일이 지나서 인형을 치우면 딸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말도 있어서 그런지 인형 장식은 이 날을 넘기지 않고 상자에 잘 포장했다가 이듬해 꺼내서 장식하는 집도 꽤 있다. 그러나 히나나가시(雛流し)라고 해서 인형을 냇물에 띄워 흘려보냄으로서 아이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해서 미리 막는 풍습도 있다. 히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고법의 서울시 문화재’인 송원조 명인은 처음 최광렬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소리보다는 북 치는 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법(高法), 곧 북가락이나 자세, 북에 대한 이론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을 잘 치기 위해서는 소리 길도 반드시 알아야 하므로 송원조는 판소리를 배우면서 고수의 길, 고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를 배우고 북을 배우던 시기는 당시 4.19학생운동, 5.16군사혁명 등, 나라 안팎의 정세가 평온치 않았던 시기였다. 그 영향일까? 그가 나가고 있던 <이리국악원> 사범들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자주 바뀌었으나, 최광렬을 비롯하여 강종철, 김동준, 주봉신, 이성근 등에게 소리와 북을 열심히 배웠다고 했다. 평소 송원조의 성실함이나 책임감을 간파한 국악원장 강점상이 하루는 그에게 국악원 총무 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총무가 되면 수업료를 내지 않고, 소리와 북을 배울 수 있었고, 게다가 국악원 내에서 살 수 있게 되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수강생이 아니라, 일정 부분 책임도 따르는 국악원의 간부가 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혔다는 점에서 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개항 초기 20대 초에 인천으로 건너와 40여 년을 이곳에서 지냈고, 지금도 인천에 잠들고 있는 여성, ‘하나 글래버 베넷'. 해방 후 ‘나비부인의 딸’로 오인당한 그녀 삶의 진상, 인천 영국영사관 건물의 구조 등 베일에 가려져 왔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전시회가 막을 올린다.(아래 줄임)” 이는 2주 전쯤 인천관동갤러리 도다 이쿠코 관장으로부터 받은 ‘전시회 안내’ 보도자료 글 가운데 일부다.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다른 갤러리들과는 달리 역사성 있는 사진전이라든가 문화, 문학, 민속을 아우르는 전시를 자주 열고 있는 곳이라 종종 취재했지만, 솔직히 이번에 보내온 <인천 영국영사관과 하나 글래버 베넷 전(展, The Incheon British Consulate and Hana Glover Bennett)>이라는 보도자료는 몇 번을 읽어봐도 전시 내용의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데다가 전시 주제로 내세운 영국인 여성 ‘하나 글래버 베넷’과 개항기 인천의 ‘영국영사관 건물’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별 흥미를 못 느꼈다. 전시 개막식 날짜로 알려 온 25일(일요일) 낮 3시는 마침 청탁받은 원고 마감까지 겹쳐 내심, 이번 개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조선 후기 문화를 꽃피웠던 인물입니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임금이지만 실제 그가 남긴 여러 자취를 통해 볼 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치밀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신하에게 비밀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들이 수신자의 집안에 대대로 보존되어 지금까지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들은 용의주도하게 정국을 운영해 가는 개혁군주 정조의 모습과 고뇌하는 정조의 인간적인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자료입니다.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 홍낙임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정조 임금 편지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정조의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정조신한-正祖宸翰 첩과 두루마리 30건)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첩입니다. 보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任賢使能(임현사능) :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일 시키다.(《세종실록》 14/4/28) ... 이것은 대체로 엎드려 〈성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성(神聖)하신 우리 임금께서는 문(文)도 마땅하게 하시고 무(武)도 마땅하게 하시는 나라의 큰 법과 기율을 세우시어 태평성대(泰平盛代)의 기초를 더할 수 없이 높였으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8) 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 급제한 문과 김길통, 무과 조석강 등이 사은의 전문을 올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대략 세종 11년부터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등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세종실록》 11/8/24) 나오고, 14년경부터는 안정된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 그리고 30년에는 융평(隆平, 갈등 없이평온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원문 기록 건수 (세종/전체). 균평(均平) 6/98, 승평(昇平) 90/1227, 태평(太平) 100여/375, 풍평(豊平) 5/7, 융평(隆平)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화관무(花冠舞)라는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화관무란 글자 그대로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서도의 춤 사범, 민천식은 황해도 해주 지역 기녀들이 추어오던 화관무라는 춤에 탈춤과 교방무(敎坊舞)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은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라든가, 유연한 몸놀림 등, 궁중무의 절제된 ‘규칙’이라든가 민속춤의 ‘자유로움’을 갖추고 있으며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반주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최승희, 김정순, 배뱅이굿의 이은관, 재담의 김뻑국, 김실자, 김나연, 외 수많은 춤꾼, 소리꾼 등이 그에게 춤과 노래를 배웠다. 민천식은 화관무 말고도 봉산탈춤을 세상에 알려서 동 종목이 국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지정받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정서를 받는 당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인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 김나연(현, 화관무 명예보유자)은 말한다. 선생은 “춤을 가르치면서도 늘 애국심을 강조해 주셨어요. 화관무는 태평성대를 소원하는 춤이라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번 한센병(나병) 전시에서는 “재일조선인 입소자의 생활 실태, 식민지 조선의 격리 정책, 그리고 패전후 국적을 박탈당한 재일조선인 한센병 환자의 고통과 투쟁을 다뤘습니다. 나아가 한센병과 우생사상(優生思想), 부락차별, 문학, 그리고 기쿠치 사건 등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2020년 <한센병과 조선인-차별을 살아내고> 전을 열었을 때 코로나19가 창궐하여 '감염병과 차별'의 문제에 직면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센병을 둘러싼 차별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이는 며칠전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가 보내온 자료 가운데 <한센병과 조선인 벽을 넘어> 소책자의 머리말이다. '한센병과 조선인?' 나는 소책자 제목을 보고 잠시 착각을 했다. 한센병과 조선인 이야기라면 몇 해 전 이미 기사를 쓴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가 보내 온 자료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이번 자료는 <한센병과 조선인>에 관한 두 번째 전시를 알리는 자료였다. 내가 전에 쓴 기사는 202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화관무란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민천식 명인이 기존의 화관무에 탈춤과 교방무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킨 춤, 당시 그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민족의 영원을 염원하며 이 춤을 연희하였다고 한다. 이 춤은 정갈하고 기품이 있으며,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나 유연한 몸놀림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궁중무의 ‘규칙’과 민속춤의 ‘자유로움’도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또한 그 반주음악이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앞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1930년대의 민천식은 민형식이라는 이름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서도의 명창이었다. 그런가 하면 춤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황해도 해주ㆍ개성 등지의 권번에서는 민천식이란 이름으로 기녀들의 춤사범으로도 활약했던 인물이다. 당시 한국 무용계를 대표하던 최승희도 그에게 와서 춤을 배웠다는 점으로 그의 명성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이다. 민천식의 제자 김정순이 전해주는 말이다. “최승희가 와서 며칠을 자면서 춤을 배우고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