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입니다. 청명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하루 차이인 내일은 명절의 하나로 지냈던 ’한식(寒食)‘입니다. 이 ’청명‘과 ’한식‘은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이어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에 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는데 이를 “사화(賜火)”라 하며, 임금은 이 불을 문무백관과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줍니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하지요. 청명 무렵에는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논농사의 준비 작업으로 봄밭갈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가래질 말고도 논밭둑 다지기, 보리밭 매기, 푸성귀 씨앗 뿌리기 같은 일들을 하느라 일손 구하기가 힘들지요. 이날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땅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후쿠시마현에 있는 우리 개간지에 찾아온 조선인 농경대(農耕隊)들은、오키나와 1호라든지 오키나와 2호라는 고구마를 심었다. 이 고구마는 아주 크게 자라는 품종으로 식용이 아니라 비행기의 연료인 가솔린이 귀해져서 가솔린 대용의 알코올을 얻기 위한 고구마 재배에 돌입했던 것이다. 2차대전 말기, 일제는 연료를 위해 소나무 송진을 모으거나 심지어는 고구마까지 활용했다. 고구마 가솔린을 연료로 한 그 비행기에는 특별공격대원 (가미카제 특공대)인 젊은이가 타는데 편도만 탈 수 있는 연료만 넣고, 돌아올 연료통에는 폭탄으로 채워 적군을 비행기채로 공격하게 하는 전술을 썼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1945년 광복 직후, 국립국악원의 전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춘천에서 공연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정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춘천지방 지역 사람들이 전통음악을 대하는 열정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실 지금도 재미없는 음악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악(正樂)에 대한 반응이 이 지역에서는 생각 밖으로 뜨거웠다는 점도 이채롭다. 1962년에 <춘천국악회>가 창립되고, 각급 교육기관에 국악취타대나 농악대, 관현악단 등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뒤를 이어 한국국악협회 강원지부가 탄생하는가 하면, <강원국악연구원>도 설립되어 악(樂), 가(歌), 무(舞)의 강습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노래 가운데 가곡이나 가사, 시조의 경우는 지역 자체에서 또는 국악원의 협조가 이루어져 그런대로 진행되었지만, 일반 대중이 가장 바라고 원하던 민요창 분야는 전문 강사를 확보하지 못하여 협회의 운영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국악의 보급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강습활동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당시 춘천지역 내에는 민요창을 지도할 만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 주는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써 왔다. 관찰부(觀察部) 행사는 정가 중심인 반면, 일반에서는 속요(俗謠)로 그 소리제는 경토리가 가미된 메나리조였다는 점, 속요에는 <노동요>, <상여소리>, <아리랑>류가 대표적이며 춘천의 옛 마을 이름과 특산물을 노래하는 「큰 애기 노래」에는 <장사타령>이나 <장타령> 등이 유명하다는 점, 그 외에 일반 민요로는 서울 경기의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1930년대 기록에 춘천정악회(春川正樂會)라는 음악단체가 조직되어 조선악 연구발표회를 하였는데, 강연, 성악, 기악이 중심이었으며 그 음악적 성격은 정악(正樂)을 표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벌써 정악회라는 단체의 이름에도 그 음악적 색채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춘천의 정악활동은 일제강점기, 아니 조선이나 고려 이전으로 올라가 춘천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삼국시대부터 이미 수많은 문사(文士)가 은거하거나, 경관이 빼어난 곳을 찾아서 춘천의 곳곳에 여러 작품을 남겼다는 점으로도 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눈보라 속 - 오노 도자부로 눈보라 치는 / 전북의 깊은 산 속이었다 / 두루마기를 입고 가방을 메고 / 승차장까지 함께 오긴 했지만 / 어떤 커브에 걸리자마자 도망치는 토끼처럼 뛰어내려서 / 옆쪽 산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구나 깊은 속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 부모가 부둥켜안고서 목 놓아 울었다하더라 -석별(조선의 젊은 친구들에게)『대해변大海邊』속의 조선인(7)- 이것도 ‘탈주자’(지난 기사에서 게재)와 마찬가지로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郎)가 조선으로 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춘천시립국악단》의 연주회 평가와 관련하여 단원의 증원 문제, 공연의 홍보와 프로그램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춘천시청과 춘천의 문화예술인, 악단의 관계자, 그리고 국악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예로부터 춘천은 강원도의 중심 도시이면서 특히 산수(山水)의 경관이 빼어나서 많은 사람이 발걸음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반의 도시로 유명하다. 이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인터넷 자료나 향토 연구자들이 남긴 결과물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은 본래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 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대로 점령하게 되는데, 백제시기에는 주양(走壤), 고구려때에는 수추성(須鄒城), 신라가 점령하던 시기에는 우수주, 수약주(首若州), 삭주(朔州), 광해주(光海州)등으로 부르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춘주(春州),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현재와 같은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각 도(道)의 으뜸 행정관청을 감영(監營)이라 불렀는데, 그 우두머리 관찰사(觀察使)가 업무를 보던 곳이어서 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한국정부는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할머니의 배상금을 자국기업의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해법을 내놓았고, 사흘 뒤 일본외상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미 지난해 여름 일본 후생성은 할머니의 통장에 친절(?)하게도 후생성 탈퇴연금 ‘99엔’을 송금했었다. 공부시켜준다고 속이다가 마침내 협박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던 양금덕 어린 소녀는 잠 못 자고 굶주리며 일해야만 했다. 고통은 그때만으로 끝나지 않고 결혼생활에 멍에가 되어 여성으로서 지독히도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한국정부의 해법에도 일본외상의 주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123년 서긍(徐兢, 태어나고 죽은 때 모름)은 송 휘종이 파견한 국신사 일행 가운데 한 명으로 한 달 남짓 고려에 머물면서 공식일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때 고려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그에 대한 면모를 기록한 것이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입니다. 이 책의 그릇 부분에는 고려의 다양한 그릇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특히 ‘도로조(陶爐條)’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산예출향도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있고 아래에는 봉오리가 벌어진 연꽃무늬가 떠받치고 있다. 여러 그릇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 그 나머지는 월요의 옛날 비색이나 여주에서 요즘 생산되는 도자기와 대체로 비슷하다.” 위의 내용은 고려시대 도자공예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산예출향(狻掜出香)'은 사자가 장식된 향로를 말하는데, 당시 서긍은 연화형(蓮花形) 향로 뚜껑 위에 사자가 장식된 것을 보고 이처럼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색은 비색(翡色)이며 매우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졌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위 기록에 맞는 가장 비슷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사자장식 향로‘입니다. 이 향로는 뚜껑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 아리랑>은 1896년, 헐버트(Hulbert)가 채보한 <구아리랑>을 고쳐 만든 아리랑이라는 이야기, 또한 <긴 아리랑>은 <본조아리랑>이나 <구아리랑>과는 노랫말, 가락, 장단형, 빠르기, 분위기 등이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 이야기는 춘천시립국악단의 발전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경기 및 서도 지방의 전통 민요를 전공하고 있는 소리꾼들은 여러 지역의 다양한 소리를 잘 부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편이다. 마치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해서 각 지역의 언어, 예를 들면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의 고유한 언어, 또는 충청도나 강원도, 제주도의 독특한 지방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각 지방의 고유한 언어가 익숙해질 수 없는 경우처럼, 민요창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래서 발성법이나 표현법, 시김새의 처리 등등이 서로 다르기에 전공 분야 외에 소리는 제대로 잘 부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곧 경기소리에 능한 사람이 서도소리를 제대로 부르기 어려운 법이고, 서도소리를 잘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시즈오카현 이즈반도(伊豆半島)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어제 라인(한국의 카톡처럼 일본인들이 주로 쓰는 것)이 하나 날라왔다. 30년 지기인 이 친구는 이삼일 걸러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내오기도 하고 어제처럼 ‘한국과 관련된 뉴스’를 보내오기도 한다. 열어보니 ‘한국의 오마카세 열풍’이라는 주제의 뉴스였다. 요점은 “일본에서는 보통 음식점인데 한국에서는 고급음식으로 둔갑(?) 되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값도 비싼 음식점”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고급음식점(?)으로 통하고 있다는 ‘오카마세’의 어원을 살펴보자. 이 말은 원래 마카세루 (任せる·委せる: まかせる)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1.(추세에) 맡기다 2.(있는) 대로 …하다 3.(일 등을 남에게) 맡기다 4.일임하다" 라는 뜻을 지닌다. 이 말이 ‘오마카세(おまかせ)’ 라는 명사화가 되어버리면 일본에서는 재미난 뜻이 된다. 야후제팬 검색창에 일본어로 ‘おまかせ(오마카세)’를 입력해보니, 빵봉지, 팬티 셋트 등 다양한 이미지가 뜬다. 이 사진에서 ‘오마카세’는 ‘마음대로 골라 담기’라고 봐야한다. 한국에서 처럼 유행하는 음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