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전수희기자] 서쪽에서 온 보배 촛불하나 괴로이 찾아 무엇하겠나 밤 깊어 산 비개인 뒤 싸늘한 달 동녘 봉에 오르네 깃처럼 펼친 띠집 호수 동쪽에 누워 나그네 오르자 만 겹의 시상 뱃전 두드리는 삿대 기러기 놀라고 물에 드린 낚시 용들 겁내네 푸른 강 흰돌 처마 끝 아슬하고 맑고 성긴 안개만 방안 찾아드네 죽방에 누웠어도 잠없이 청결한 몸 바람 결에 은은한 두어마디 종소리 이는 침굉대사(枕肱大師,1616∼1684)의 『침굉집』에 실려 있는 노래다. 침굉대사는 10살에 출가하여 18살 때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다쳐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는데 그때 대사는 “만 권의 경전을 읽어도 눈병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부처가 무언가, 마음이 곧 부처지”라는 깨달음으로 모든 문자에서 벗어나 수행에 들었다고 한다. 침굉대사와 윤선도의 만남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침굉대사가 윤선도를 찾아갔는데 마침 윤선도는 아들 의미(義美)가 죽고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침굉대사가 윤선도의 죽은 아들과 닮았는지, 윤선도는 침굉대사를 아들로 삼고 싶어 대사의 스승인 보광대사에게 침굉대사를 양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보광대사는, “불가에서 스승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조용한 삶 일 없어 오갈 이 적고 일 앉음 편안해 기운을 돋운다 과일따려 숲 들자 가을 이슬 지고 차 달이는 불꽃에 저녁 연기 인다 들 물 못에 이어 오리들 모이고 산 구름 뜰에 눕자 사슴 뛰노네 정적 속에 살피는 자연의 이치 풍성한 만물은 저절로 자라지. 이는 설암대사(雪巖大師,1651~1706) 의 ‘유거(幽居)’를 노래한 시로 산사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대사는 편양당의 제자인 월저대사의 제자이나 스승 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스승이 비문을 짓게 되었다. 10살에 원주 법흥사에서 출가하여 월저대사 문하에서 10여년 수행하였다. 『설암잡저』 3권과 『설암선사난고』 2권이 전해진다. 잡저에는 시문이 806편에 이르며 그 가운데 시는 132편 전한다. 홀로 오른 강 누대 아득한 시선 난간 앞에 펼친 끝없는 경치 강물 일렁이는 푸름 포도송이 넘치고 뭇 뫼 영웅 다툼 창칼 이은 듯 이 경계 하늘 위의 땅 아니지만 아 몸은 그림 속 신선인가 의심쩍다 바람에 모두 날린 평생의 한 다음에는 술 샘 물을 것도 없다. 맑은 샘 이빨 울리고 가을 햇살 산 눈썹 비추다 골 깊어 다니기 힘들어 조심스레 의지하는 등나무 가지 하나. 돌구멍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눈 속에 핀 매화와 먹물 속의 매화 채색의 예쁨이나 자연의 향기 차이 있지만 진짜다 거짓이다 말하지 마소 모두 봄빛을 가져다 시인에게 준 것을. 소상강 댓바람 섞여 취봉에 자라더니 부채로 다듬어져 번잡한 가슴 씻기네 이 다음 여름날 선탑을 찾으시면 오늘의 이 사랑스런 베품 기억하지요. 이는 풍계대사(楓溪大師,1640~1708)가 속가의 선비들과 주고 받은 노래다. 대사는 고관대작의 자제로 11살에 청평사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13살에 금강산으로 가 풍담대사를 스승으로 10여년 수행하였다. 풍담대사가 입적한 뒤에는 용문산과, 오대산으로 가 청봉대사 밑에서 6년의 정진을 이어가는 등 명산을 두루 찾아 선각들에게 배움을 청했다. 『유람총집』은 이 때 쓴 것이다. 세수 68살, 범랍 57살로 입적하면서 “허망한 바다 뜨락 잠기락 몇 봄을 지내며 명망에 사로잡혀 허수아비 희롱한 사람 되었다”는 게송을 남기고 합장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젊은 시절 지팡이 신령스런 매체로서 동쪽나라 삼산을 대략 돌았네 꿈속의 산천은 비단처럼 분장하고 눈에 선한 하늘 구름 유리처럼 깨끗하다 신선골에 학의 장수 인정으로 그리는 것이고 양의 창자인양 세상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오래 머문 산사, 돌, 물, 언덕 옛 친구 찾아온 지팡이 하나 향기 뜰 나무도 늙어 가을 빛 이르고 누각의 종소리도 멎어 어둠 재촉하네 진락대 주변엔 봉우리만 일만 겹 침계루 밑에는 시냇물도 천굽이 맑은 등불, 책상 앞, 잠도 없는 해맑음 이별 시름 이야기 끝나 식은 재만 헤집네. 먼 뫼에 가랑비 걷히고 창이 높아 산들바람 끌어온다 책상 앞 잠깐의 새우잠을 몇 마리 새 울음 꿈을 깨운다. 이는 백암대사(栢庵大師, 1631~1700)의 노래로 대사는 13살에 출가하여 금강산의 취미대사(翠微大師, 1590 ~ 1668) 밑에서 9년간 수행하였다. 42살에 영광의 해불암에 주석하였고 46살에는 송광사에서 보조국사의 비와 송광사 사적비를 세웠다. 50살 때인 숙종 7년(1681) 큰 배가 임자도 앞 바다에 표류되었는데 그 속에 불교 서적이 가득했다. 그 책 가운데는 명나라 평림엽(平林葉) 거사가 교정한 <화엄경소초>, <금강경간정기>, <기신론필삭> 등 190권이 실려 있었다. 이에 백암대사는 15년간 5천판을 새겨 징광사, 쌍계사에 진장(珍藏)하는 등 평생을 경전 간행과 포교를 필생의 업으로 삼았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평생을 웃어야 하는 나의 사람됨 온갖 비방 불러서 허물이 잦다 외로운 학인양 나라 지킬 수 없는 재주 소나무도 말이 없다 할 말 있으랴 겨우 3년 동안의 녹이라는 자리 백일도 아니 되는 도총섭 업무 벼슬이란 원래 자연과 맞지 않는 것 급히 날리는 석장 산중으로 가리라 이는 백곡대사(白谷大師, ? ~ 1680)가 남한산성 도총섭 자리를 맡았다가 얼마되지 않아 그만 둔 뒤 지은 노래다. 현종4년(1663) 서울 도성 안의 승려를 성 밖으로 쫓아내고 절에 소속된 재산을 몰수하며 승려를 환속 시키는 것에 대해 백곡대사는 전국의 승려를 대표하여 그의 부당성을 상소했다. 그것이 『백곡집』에 남아있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다. 이 간폐석교소는 8만여 자에 이르는 상소다. 현종은 어린 두 공주를 잃게 되자 봉국사를 짓게 했는데 이 절의 <봉국사신창기(奉國寺新創記)>를 백곡대사가 부탁한 것을 보면 현종이 백곡대사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다. 중은 말 한필 갑옷 입었고 술 실은 조각배에 재상님 오셨네 포구의 석양은 까마귀 몰아가고 바다 끝 가을빛은 기러기 가져오네 시 한편 마치기도 전에 서로 이별 만날 기약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오는 바람에 구름따라 오고 바람 가면 구름도 따라가지 구름은 바람따라 오간다지만 바람 자면 구름은 어디에 있죠. 발걸음 동서 남북의 길 지팡이 일만 이천봉 봉우리 밝은 천지 집 없는 나그네 태백산 속의 머리 기른 중. 이는 월저대사(月渚大師,1638~1709)의 노래로 대사는 12살에 출가하여 금강산에서 풍담화상 밑에서 20년간 수행하였다. 그 뒤 묘향산에서 법당을 세우고 대중교화에 힘썼다. 이 노래가 실린 『월저집』은 묘향산 내원암에서 간행되었다. 회주에서 풀을 뜯는 소 익주의 말이 배가 터진다 천하에 이름난 의사들 돼지 어깨에 뜸을 뜨네 깊은 산 숨은 범 큰 바다에 잠긴 용 풍운 변화 얻으면 푸른 하늘 솟아오르지 위 노래에서 회주니 익주니하는 공간이나, 말이니 돼지니 하는 동물도 의미없는 개념일뿐 월저대사의 관념은 ‘구애됨이 없는 자유로움’이다. 묘향산 밑 오두막집 누가 너를 알아주었나 몸은 구름에 싸여 숨고 꿈에 들자 달도 뜨네 발길은 원숭이가 친구 선정에 든 나 학이 깨우네 분향과 예배로 아침저녁 딴 일은 없어. 이는 묘향산에서 지은 시다. 월저대사는 팔도선교도총섭에 임명되지만 사양하고 오로지 불도를 닦는
[우리문화신문=전수희기자] 서쪽에서 온 보배 촛불하나 괴로이 찾아 무엇하겠나 밤 깊어 산 비개인 뒤 싸늘한 달 동녘 봉에 오르네 깃처럼 펼친 띠집 호수 동쪽에 누워 나그네 오르자 만 겹의 시상 뱃전 두드리는 삿대 기러기 놀라고 물에 드린 낚시 용들 겁내네 푸른 강 흰돌 처마 끝 아슬하고 맑고 성긴 안개만 방안 찾아드네 죽방에 누웠어도 잠없이 청결한 몸 바람 결에 은은한 두어마디 종소리 이는 침굉대사(枕肱大師,1616∼1684)의 『침굉집』에 실려 있는 노래다. 침굉대사는 10살에 출가하여 18살 때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다쳐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는데 그때 대사는 “만 권의 경전을 읽어도 눈병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부처가 무언가, 마음이 곧 부처지”라는 깨달음으로 모든 문자에서 벗어나 수행에 들었다고 한다. 침굉대사와 윤선도의 만남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침굉대사가 윤선도를 찾아갔는데 마침 윤선도는 아들 의미(義美)가 죽고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침굉대사가 윤선도의 죽은 아들과 닮았는지, 윤선도는 침굉대사를 아들로 삼고 싶어 대사의 스승인 보광대사에게 침굉대사를 양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보광대사는, “불가에서 스승과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골짜기 들자 걸음은 댓숲 뚫고 누대 올라 시름을 달랜다 소나무 짙은 푸르름 집 안으로 들고 돌부리 차게 흐르는 물 여름을 마중하고 맑은 햇살도 시원한 가을인가 의심하다 저렇듯 아름다운 시내 산 사람들 한번쯤 되돌아보지 못하네 취미대사(翠微大師, 1590 ~ 1668)의 속성은 성(成)씨로 성삼문의 후손이다. 13살에 출가하여 벽암대사를 은사로 모시고 득도하였다. 그러나 불도(佛道)외의 학문을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잠시 한양으로 나아갔다. “옛날 덕을 쌓고 도를 행하는 이는 모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학문에도 밝아 유가를 대하면 유가를 이야기하고, 노장을 대하면 노장을 이야기 하여 업신여김이나 비방함을 막아 부처님의 교화를 일으켰거늘 어찌 오늘날 마음을 닫아 담에 낯을 대한 자 같으랴” 문장은 조그만 재주일뿐 도 보다 높단 말 못하지요 두보의 훌륭한 지식이 우리에게는 참다운 걱언이지만 어쩌면 운수(雲水)의 게송을 가지고 속세의 선비와 논할 수 있겠오 오히려 이 문필의 꾸민 버리고 그대의 불이문(不二門)에 귀의하고 싶소 이는 재상 임유휴가 취미대사에게 보낸 시로 취미대사는 유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과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산이 맑은 시냇물에 잠기니 위 아래로 붉은 단풍 숲 중을 불러 반석에 앉으니 이것이 그림 속이 아닐까 태수는 일 없으신 몸 산인도 마음이 비었소 서로 이끌어 시내 위에 앉으니 서풍에 지는 누른 단풍잎 이는 운곡 선사(雲谷 禪師)의 시다. 운곡 선사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하며 지은 시가 『운곡집』에 전한다.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1563 ~ 1628)을 비롯하여, 동악 이안눌(1571∼1637), 계곡 장유(1587∼1638) 등 조선 중기의 쟁쟁한 문장가들과 주고받은 시를 통해 운곡 선사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운곡집』에는 170여 수가 전하는데 특히 이안눌과 주고 받은 시가 30수나 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태수는 원래 도를 좋아했고 스님은 특별히 시를 하죠 풍진 세속에는 길을 달리했지만 운수의 자연에는 똑 같은 마음 옛 고을에서 맞이하겠다 하여 봄 성을 지나다 들렸구료 지금 이 허락한 교분 늙어도 끝내 변함없겠지요. 여기서 태수는 이안눌 선생이다. 서로가 걸어가는 길은 다르지만 ‘자연에 노니는 마음’은 똑 같은 마음이라는 데서 운곡 선사의 승속에 대한 관념을 이해 할 수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바다 하늘 다한 곳 풍경도 뛰어나 만 이랑 푸른 물결 노닐어 풍류 멋 있으니 피리소리 달과 어울려 구름 사이 닿다 이는 유달리 금강산을 사랑한 제월당( 霽月堂, 1544~1633)대사가 강원도 청간정을 지나며 지은 시다. 끝없이 펼쳐진 동해 바다를 보며 제월당 대사는 ‘만 이랑 물결’에서 풍류를 느낀다고 했다. 계단 옆 뜰가 두루 돋은 이끼 깊이 잠긴 솔문 열지 않음 오래다 아마도 주인이 신선된 까닭일까 달 밝은 밤 때때로 학 타고 오겠지 제월당 대사는 당호인 ‘제월(霽月)’에서 보듯이 달을 매개로 많은 시를 썼다. 영혼은 하늘 날아 천 길 계수나무에 날고 꿈은 비로봉 만 길의 소나무에 맴돈다 깨어나면 옛 침상에 옛 모습의 자신과 시내에 가득한 바람이요, 봉우리에 숨는 달뿐 이는 몽유금강산(夢遊金剛山)이란 시다. 신선, 학, 계수나무, 달의 시어가 주는 풍류는 제월당 대사 만이 가진 선경(仙境)의 정서일지 모른다. 어느 곳 푸른 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신세만 고달프게 딴 곳으로 달리네 진실로 자기 집 보배만 얻을 수 있다면 물 물 산 산 모두가 고향인 것을 (뒷 줄임) 제월당 대사는 40여년 설법을 하면서 어디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