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밤 고요하자 산도 흔들림 없고 나 한가로워 진리의 정 펴나니 그 중에서도 뛰어난 멋은 백옥의 폭포 구슬 소리 날리다 – 월파대사, 산경치를 즉석에서 읊다- 월파대사(月波大師,1695~?)는 속성이 김씨이고, 15살에 출가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삼변(三卞) 스승을 은사로 삼았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돼 아버지 상을 당해 귀가했다가 다시 산문으로 들어가 운봉화상(雲峰和尙)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운봉, 혜월, 운파, 환암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이름을 날렸으며 30여 년간 교화에 힘썼다. 그러나 제자는 많이 두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씨 뿌린 것은 많으나 거둬드릴 곡식이 적다. 이 또한 분수이니 한스러워해 무엇하랴”라는 뜻을 자신의 행장(行狀)에 남기고 있다. 월파대사는 월파집<月波集>을 남겼는데 이 문집에는 시 125편이 전해지고 있다. 힘겹게 오른 신선의 경계 자연풍경 어찌 쉽게 거두랴 언덕머리에 봄 그림자도 사라지고 하늘 끝에는 햇살이 떠 있다 –상원사의 경치 가운데- 동서남북으로 담담히 노니는 나그네 이름난 산 천만 층을 다 밟았다 종일토록 진경 찾아 돌아오는 길 훌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큰 바다 동해로 끝나고 층층의 봉우리 북극까지 닿다 굽어보는 성 밑 물에는 거울 속 다리를 건너는 사람 -낙민가- 조용히 푸른 산 마주하고 앉으니 산은 백발이 왔다고 싫어하나 바위 앞 한 떨기 꽃은 나를 위로해 늦봄에 피었구나 –괴정에서 우연히 읊다- 천경대사(天鏡大師, 1691~1770)는 이름이 해원(海源)이고, 호는 함월(涵月)이다. 속성은 이씨이며 이태조의 고조인 목조의 후손이다. 어머니 조 씨가 꿈에 바닷물을 긷다가 큰 물고기를 얻어 대사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름 해원(海源)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4살 때 도창사(道昌寺)에서 석단(釋丹)스님에게 출가한 뒤, 능허영지(凌虛英智)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환성(喚醒)화상에게 귀의하여 6년을 모시면서 득도하였다. 평소의 마음가짐은 사람들이 친함과 관계없이 주리거나 추위에 떨면 자신이 춥고 배고파도 옷과 밥을 서슴없이 내주어천경대사를 불심(佛心)이라 불렀다. 몸은 구름과 함께 환상계로 왔다가 마음은 달을 따라 어디로 가나 살아오고 죽어감 오직 구름과 달이니 구름 절로 흩어지고 달은 절로 밝아 이는 천경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오래도록 암자에서 괴로운 생각에 묶였다가 가을바람에 시냇가 나앉다 맑은 노을 두어 쪽이 솔잎 섞여 씹히니 내 앞에 신선 길 있음 비로소 알겠다 늙음에 이미 온갖 병 깊이 얽매이니 때때로 지난날의 먼 나들이 생각나다 도반에 억지로 끌려 가을산 오르니 끝없는 흰구름 무릎 앞에 둘리네 이는 해봉대사(海峯大師,1707~1785)의 ‘을미년 가을 놀이’로 69살 때 지은 시다. 해봉대사의 글은 <호은집> 4권이 전하고 있는데 그는 머리말에 쓰길 ‘누구의 퇴고를 받는다든가 문인들의 수집도 바라지 않는다’ 고 했다. 그만큼 해봉대사의 글쓰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오로지 자신의 느낌을 붓가는 대로 걸림 없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시냇물 입가심, 정신도 맑고 잣잎따서 요기하니 기운이 평안하다 세상에 만족함 아는 것보다 더한 것 없으니 어찌 명예나 이욕으로 남은 해 마치랴 -‘무진년 9월 9일 대견사 옛터에 올라’ 4수 가운데 1수- 욕심 없는 해봉대사의 맑고 투명한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홍류동 바위에 고운의 시가 천년 가야산 전각에 해봉의 진영이 한 폭 시와 진영 무엇이 오래이고 무엇이 짧은가 신선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성글고 벗어남 얽매임 없어 평생을 뜻대로의 걸음 자비구름 저 끝에 일고 마음달 허공 비춰 밝네 속세에서도 좋고 싫음 없었거늘 진여세계에서 기쁨 놀람 있으랴 부처하늘 서쪽 끝에 있기에 공(空)의 풍류 상상 속에 들리다 이는 용담대사의 ‘회포를 읊는다’라는 시다. 용담대사(1700~1762)는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 상을 지내며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라 불렸는데 9살 때부터 배우는 것은 모두 기억했으며 15살 때는 이미 유가의 경전을 섭렵했다고 전한다. 19살에 감로사에서 득도하였으며 22살에 화엄사에 들어갔는데 상허대사께서 큰 그릇이 될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애써 깊은 심회로 대중에게 알리노니 강단에서 헛되어 현기(玄奇)를 희롱했구나 젊은 나이에 경전 강독 허락되었지만 머리 희어지니 염불이 가장 마땅해 죽고사는 것은 성인의 힘에도 의지 못하니 계획없는 오르내림 그대로 맡길밖에 더구나 세상살이 자못 요란할 뿐 흰구름 깊은 골 돌아갈 생각만 이는 용담대사가 문자공부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게송’ 형식으로 학인(學人)들에게 쓴 시다. 용담대사는 33살 되던 해에 영원암에 들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첫봄 풍경이 오히려 쓸쓸하구나 나는 강동에 살고 그대 서쪽으로 가니 무정한 학 가는 곳마다 춤을 추나 주린새는 생각있어 사람보고 운다 조계사 이 밤은 천겹으로 둘린 산 불갑사 어느해에 손을 마주 잡을까 높낮이 출렁이는 옛 가락을 아는 이 없어 고개 넘어 나직한 구름 시름겨워 바라보다 이는 상월대사(霜月大師, 1687~1767)가 축계 스님과 이병하며 쓴 시다. 상월대사는 순천 사람으로 속성은 손 씨다. 어머니 꿈에 한 스님으로부터 구슬 한 알을 받아들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스님이 될 인연이라고 전한다. 11살 때 선암사에 출가하였으며 16살에 문신대사(文信大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벽허, 남악, 환성, 연화 등 큰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후학들에게는 문자의 뜻을 떠나 뜻을 밝혀 근본 원리를 밝히는데 힘쓰도록 지도하였다. 1754년에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열어 1200여명의 문도가 모일 정도로 법력이 뛰어났으며 81살로 입적했다.(법랍 70살) 오래 머무름, 사람 천하게 됨 알기에 4년 동안의 두류산에서 흩어지게 하다 시름 겨우면 기러기 소리도 견디기 어려운데 나그네 길에서 지기를 떠나보냄이야 지팡이 둘러
[우리문화신문=전수희기자] 굳은돌처럼 뜻을 지키고 청결한 얼음처럼 정신을 집중 비고 고요함 잘 지켜 물이 맑아지듯. - 자경(自警)- 보내고 맞이하는 문 앞 길 지는 꽃 사람들 쓸지 않건만 봄바람은 그래도 정이 있어서 시냇가 풀 언덕에 불어보낸다 – 차홍진사중익운(次洪進士重益韻)- 위 시는 허정대사(虛靜大師 1670~1733)가 지은 시로 특히 자경(自警)은 자신의 몸가짐을 경계하기 위해 《도경(道經)》에 나오는 ‘높은 경지의 사람 마음은 고요함을 잘 보존하며 맑은 물과 같다’를 인용하여 지은 시다. 대사의 법명은 법종(法宗)이고 허정은 그의 호이고 속성은 전(全) 씨다. 묘향산에서 월저(月渚)대사와 설암(雪巖)대사에게 배웠다. 바다산 저녁 볕에 숨는 학 깊은 골 가을하늘 흩어지는 구름 줄줄 여울지는 바위 위 물 길이 만고의 시름 품었다 이는 허정대사가 스승 설암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지은 시다. 허정대사는 어버이를 그리워 하는 지은 시도 지었는데, 성근비 가을 산밖 저녁놀 고목나무 저쪽 해저문 하늘 기러기 울음 왜 나그네 시름 끌어내나 –사향(思鄕)- 가랑비 내리는 싸늘한 강 저쪽 사라지는 노을 지는 해 저편 고향은 어느곳일까 멀리 바라보는
[우리문화신문= 전수희기자] 두어 이랑 심은 외밭에 피는 노랑꽃 먼저 핀 꽃 시들고 나중 꽃 아름다워 이슬은 떨기 적셔 푸른 잎 무성하고 비로 다져진 흙에 가지 더 돋는다 몇 자씩 뻗는 넝쿨 긴놈 짧은 놈 몇치로 자란 열매 누운 놈 서 있는 놈 용의 발톱인 모습 비단처럼 고운 빛깔 아이에게 따게 해 어버이 공양하라네 이는 ‘외심은 데 외난다’다라는 제목으로 영해대사(1668~1754)의 선시다. 영해대사는 전라남도 고흥출신으로 10살에 출가하여 능가사(楞伽寺)의 득우장로(得牛長老)의 제자가 되었다. 17살에 수연(秀演)으로부터 계(戒)를 받았으며, 22살부터 경전 공부에 몰두하였다. 28살에 어머니가 죽자 모든 현상세계가 오직 마음(唯心)에서 비롯된다는 선지(禪旨)를 체득하고 피나는 참선정진을 시작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자수암(慈受庵)에 들어가서 많은 학승(學僧)들을 지도하였다. 55살 때에는 공장(工匠)을 시켜서 불화(佛畫)를 그리게 하였고, 54살 때에는 송광사(松廣寺)로 자리를 옮겼다. 장엄한 옷차림의 조정대신을 절 동녘 숲에서 맞이하였소 형식 떠나 깊숙이 맺은 인연 구름가 저녁 경치 찾았구료 바위 머리엔 푸른 구슬 흐르고 황금을 흩어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달팽이집 옹졸한 나에게 맞아 턱을 괴고 저녁 나절 이르다 한낮에도 뻐꾹새 우니 이 삶이 깊은 줄 비로소 알겠다 –제초당(題草堂)- 환성당(喚醒堂, 1664-1729) 대사는 이름이 지안(志安)이고 환성(喚醒)은 호다. 춘천에서 태어나 15살에 용문사로 출가하여 설봉대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17살에 청허대사의 수제자로 입문하였다. 27살에 직지사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때의 상황을 문인 함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 강당에 오를때에 모습은 위엄을 띄고 법론은 청정 유원하여 일정한 거처가 없이도 이르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으니 교의를 논하면 만경의 파란이 양양히 넘치는 듯 하였고, 선지를 펴면 천길 벼랑이 외외히 높은 듯하였으니 지금 나라 안에서 선을 실행하고 교의에 통하는 이는 대사의 영향이다.” 을사년(1725)에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때도 구름처럼 많은 대중이 몰려들었으나 이날의 법설이 4년뒤 문제가 되어 무고죄로 제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입적하게 된다. 세수66살이요, 승랍 51살이었다. 벗 삼을 친구도 없는 늙은이 지팡이 끌고 홀로 배회하다가 심심풀이로 산벌 쫓다 길이 멀어 스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네 살고 내 죽었다면 죽음 무엇 슬프랴만 네 죽고 내 삶, 삶 또한 슬프다 서풍에 뿌리는 눈물, 원망만 아득하여 늘그막 지는 해에 끝없는 슬픔. 이는 무경대사(無竟大師, 1664~1737)가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다. 대사는 16살에 출가하여 운문사의 추계대사 밑에서 10여년간 수행 정진하였다. 25살 되던 해 은사인 추계대사와 쌍계암으로 돌아왔으나 은사가 이듬해 입적한다. 비록 출가한 몸이지만 속가의 어머니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모셔다 지극 정성으로 18년간 모시다가 돌아가시자 양지 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이전에 무덤자리가 안좋아 걱정하던 아버지의 무덤과 함께 길지를 택해 이장하여 대사의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그뒤 강원의 초청 등을 물리치고 적조암 서쪽에 암자를 지어 보경당이라 짓고 수행 정진하였다. 대사의 시문집은 『무경집』 3권과 게송문집인 『무경당실중어록』 2권이 전한다. 고요한 산사에서 소리없이 수행하면서 읊은 시를 감상해보자. 긴 봄날 암자에 탐낼 물건이 무엇 가는 버들 그늘가에 망울 틔는 살구꽃 유별난 곳 좋은 풍경 엉킬 만큼 짙어 비 몰고 오는 바람 청홍색깔 희롱하네. 깊고 깊은 마을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수레 떠들썩 산문에 들어 하루밤 이야기 몇생의 인연 내일 아침 홀연 행차 떠나면 깨어도 못잊을 꿈 속의 신선 한 굽이 맑은 시냇물 콸콸 겹겹의 구름나무에 골문도 깊어 중 돌길로 가고 구름 골짜기 찾고 새는 꽃 가지에 나그네는 누대에 드네 스스로 얻은 임천의 끝없는 멋 속세에 남은 근심 알리 없네 삼황이나 오제는 무엇 하신분 태초의 참새와 노느니 못해 이는 무용당 대사(無用堂 大師,1651~1719)가 속세의 선비와 나눈 노래다. 대사는 19살에 출가하여 송광사의 혜공 대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선암사, 조계사, 신흥사 등을 거치며 수행 정진 하였으며 1694년(숙종 20년) 지리산 신흥사에 있던 은사 스님인 백암 선사의 입적으로 강원을 맡아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무용당 대사의 명성을 듣고 밤낮으로 제자들이 몰려들자 홀연히 물리치고 “한갓 혀나 놀려대는 것이 어찌 염불에 전념하는 것만 하랴” 면서 용문산 은봉암에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저술에 몰두하였으며 숙종 45년(1719) 세수 69살, 법람 51살에 입적하였다. 무용당 대사의 선시(禪詩) 한 수를 감상해보자. 만물이 한결 같지 않음 알겠지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