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병산이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안사리의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이슬람을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나의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4월에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주 전동성당에서 ‘갈리스도’라는 본명(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집안이 3대째 천주교였기 때문에 모태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나는 30년 동안 천주교 신자로서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가 개신교에 다니는 아내를 만나 혼인한 뒤 31살이 될 무렵부터 아내를 따라 개신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내었고 성가대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러다가 61살이 되던 해에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나는 불교에 관심을 두었다. 그 뒤 재혼한 각시와는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 있는 금산정사에 둘이 가서 불교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금산정사를 통하여 받은 조계종 신도증에는 법명이 무심(無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우리나라 3대 종교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이슬람은 생소했는데, 이번 순례 여행에서 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실크로드 순례길에 동참하러 와서 세 번째 맞는 일요일이다. 에너지가 충만하고 씩씩한 병산은 오늘도 앙카라 시내를 구경하겠다고 나갔고, 나는 하루 쉬기로 했다. 로자 씨와 따님도 밀린 빨래를 하면서 오늘 하루는 쉰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혼자 앙카라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사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결정을 병산이 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졸졸 따라다니면 되었다. 막상 혼자 지하철을 타고 앙카라역까지 갔다 오려고 하니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까 약간은 걱정이 앞선다. 터키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구글 지도를 검색하여 숙소에서 가까운 역에서부터 앙카라역까지 표시된 지도를 사진 찍었다. 그리고 출발역과 도착역을 외우고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숙소를 나섰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우선 표를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헷갈린다. 매표창구 앞에서 서성이는데, 갑자기 “May I help you?”라고 말하면서 터키 여인 두 명이 나에게 다가와 도와준다. 영어로 대화가 되니 수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여인이 자기가 가진 신용카드로 내게 일회용 표까지 사주는 것이 아닌가? 터키 사람의 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괴메레에서 터키의 수도 앙카라까지 300km를 이동하는 날이다. 나는 오늘도 새벽기도를 알리는 아잔이 들리기 이전에 잠이 깨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때에 이슬람은 ‘한 손에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호전적인 종교라고 배웠다. 정말로 이슬람은 코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칼로 죽였는가?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진실을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배운 세계사에도 가짜 뉴스가 섞여 있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은 13세기에 기독교가 십자군 원정에서 패배할 무렵에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가 이슬람을 깎아내리기 위하여 지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슬람은 결코 정복지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이슬람은 600년 동안이나 그리스를 포함하는 발칸 반도를 지배하였지만 그리스는 지금껏 정교회를 믿고 있다. 무력으로 종교를 전파한 쪽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는 아랍 세계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동방교회까지도 공격했는데, 정교회를 믿는 이스탄불 공격을 계기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갈라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괴레메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괴레메 계곡에는 30개가 넘는 암굴교회가 있다. 이들 암굴교회가 몰려 있는 곳을 야외박물관이라 이름 붙이고 울타리를 치고 입장료를 1인당 48리라(한국 돈 1만 원)를 받는다.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과 함께 야외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바위 속에 작은 성당을 만들고 벽화까지 그려놓은 암굴교회는 로마의 카타꼼 지하 묘지교회와 함께 기독교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로자 씨에게 물어보니 감리교 신학교 다닐 때 암굴교회에 관해서 교회사 교과서의 한 장으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최초 기독교 수도자들의 흔적은 카이세리에서 성 바실리오(330~379)의 가르침을 따르던 공동체 사람들이 바위에 굴을 파서 살기 시작한 4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괴레메 계곡의 암굴교회는 대부분 12~13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야외박물관 안에 어둠의 교회(Dark Church)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을 관람하려면 추가로 입장료를 18리라 받는다. 나는 사실 벽화나 조각이나 미술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이 크지도 않아서 병산만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와는 달리 창문이 없는 동굴 숙소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한여름인데도 덥지 않았다. 평소처럼 새벽에 잠이 깨었다. 텔레비전은 없고,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참고로 하여 재구성한 무함마드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는 570년에 아라비아반도의 서쪽에 있는 메카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 하심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으며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여섯 살 때 돌아가시고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촌인 아부 탈리브가 맏아들처럼 키웠다. 그는 고아들이 으레 겪는 모멸과 멸시를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과부와 고아가 겪는 아픔에 평생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메카 사람들 대부분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무함마드 역시 문맹이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신뢰 깊고 인자하며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졌고 사람들은 그를 ‘아민(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불렀다. 무함마드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카이세리에서 괴레메까지 거리는 71km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매우 안락하고 내부 시설이 좋은 관광버스였다. 남자 차장이 있었는데, 승객들에게 마실 차를 가져다주는 무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말이지, 터키 사람들은 어디서나 친절하다. 괴레메는 카파도키아 지방을 관광할 때에 꼭 거치는 중심 도시이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다음과 같은 정보를 알아내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예전의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지역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Kapadokya)에 해당한다.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카파도키아는 실크 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대상 행렬이 근대까지 이어졌다. 카파도키아는 매우 넓어서 동서로 최대 400㎞, 남북으로 최대 250㎞에 달하는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300만 년 전 에르스시예스 산(3917m)에서 대규모 화산이 폭발할 때 마그마 분출로 만들어진 용암 바위 주위로 화산 분진이 내려앉아 응회암으로 굳어졌는데, 응회암은 화성암에 견주어 경도가 약하기 때문에 쉽게 풍화되어 깎여 나가고 카파도키아 지역 특유의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역에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10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새벽 2시에 카이세리역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다. 이제 여행도 3주가 되어가고 여행 가방을 끌고 가면서 갑자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마도 우리가 탄 기차는 아침에 앙카라에 도착하도록 시간표가 맞추어져 있나 보다. 카이세리는 중간역이기 때문에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고 조명도 어둡고 역 앞은 조용했다. 우리는 모처럼 택시를 타고 예약한 호텔로 갔다. 그 호텔은 지금까지의 숙소와는 달리 시설이 좋은 서구식 고층 호텔이었다. 병산에게 물어보니 1박에 미화로 28달러(우리 돈으로 3만원)라고 한다. 오전 11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8층 방으로 가서 각자 잠을 잤다. 나는 요즘에 잠을 적게 잔다. 원래는 잠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잠이 적어져 최근에는 하루에 4~5시간 정도 자면 충분하다. 아침 7시쯤 잠이 깨었다.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카이세리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카이세리는 터키 중부에 있으며 2017년 기준 인구 94만 명의 큰 도시다. 옛날 카파도키아 왕국의 수도일 때, 마자카(Mazaka)로 불렸다. 카이세리라는 이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에르진잔에서는 하루만 자고 우리는 오늘 저녁 4시에 기차를 타고 카이세리까지 가야 한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식당 입구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었다. 로자 씨는 에르주룸에서 우리와 합류하기 전 1주일 동안 터키를 여행하였는데 터키 사람들은 도무지 이슬람 사람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도시에 처음 들어가면 곳곳에 모스크가 보이고 히잡을 쓴 여성도 보이고 때때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지므로 이슬람 국가인 것은 맞는데,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이슬람의 냄새가 없다는 것이다. 터키 사람들은 음식점에서 술도 마시고 길거리에서 담배도 피우고, 심지어는 히잡 쓴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 교제도 자유스러운 것 같고 남녀 간에 애정 표현도 유럽 국가 못지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엄숙한 이슬람교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얘기다. 에르진잔은 인구 1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인데도 모스크의 첨탑이 곳곳에 보인다. 터키에는 등록된 모스크가 75,000여 곳에 달하고, 이스탄불에는 3,000여 곳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하여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아보았다.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정교(政敎)분리를 기본으로 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오랫동안 터키에서는 정치 지도자인 술탄이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하는 정교일치 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는 술탄제를 폐지하고 칼리프는 오직 이슬람 종교만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슬람 종교도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는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모든 수도원과 교단을 폐쇄했다. 그는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라고 말했는데, 종교적인 교육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식의 탈 종교적인 학교들을 설립했다. 오스만의 모든 법체계가 현대화되었으며 새로운 민법과 형법이 채택되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변화시켰다.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하여 남녀평등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민법을 개정하여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다. “여성도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히잡 금지령을 도입하였다. 오랜 전통인 히잡을 강제로 금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에르주룸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188km 떨어진 에르진잔에 가는 날이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시간이 많이 남았다. 기차표는 이미 예매해 두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병산은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근처에 있는 케말 파샤 기념관으로 걸어가서 구경하고 오겠다고 한다. 나는 이틀 전인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하여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나는 병산에게 역에서 쉬겠다고 말했다. 아래 사진 두 장은 병산이 찍어온 것이다. 에르주룸 기차역에서 의자에 앉아 손말틀(휴대폰)로 무스타파 케말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무스타파는 1881년에 마케도니아 지방의 큰 도시 테살로니카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슬람 학교가 아닌 일반 사립학교에 보냈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터키의 관습대로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하여 그냥 무스타파였다. 그런데 수학교사가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그에게 완벽하다는 뜻의 ‘케말’을 별명으로 붙여주었다. 무스타파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어서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다. 그는 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