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가을내꽃 온몸에 받아 들여 오늘도 밤을 새워 술독을 소리하고 두둥둥 보름달 떴네 술맛이 으뜸이네. * 가을내꽃: 국화꽃 예나 지금이나 가윗날을 즐기는 일은 본국이나 나라밖이나 다름없다. 우리 선친은 국화꽃을 아주 싫어했다. 국화꽃은 일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을이면 국화주는 즐겨 드시었다. 드신 뒤에는 일왕을 삼켰다고 씽긋 웃으신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은 교포들에게 천대와 멸시와 차별의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온 논의 움벼 떼는 파랗거늘 어딜 가나? 가을을 못 보고 겨울이 닥쳐오면 말없이 숨지는 목숨 가엾기만 하느나. 오늘날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난날의 재일 동포 청소년들 속에는 ‘움벼’로 그만 인생을 끝내는 일이 많았다. 다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천대와 멸시 정책과 본국의 기민정책이 그 큰 원인이다. * 움벼 : 가을에 베어 낸 그루에서 움이 자란 벼.
낮에는 솟아나고 밤에는 간 데 없고 또 보낸 이 해의 무거운 보름이라 그날은 새치를 태워 쥐불놀이 하자쿠나
막걸리 한 잔에 사나이는 꿈을 품고 짝사랑 아가씨는 눈물을 짓느니 이 땅은 어느 누리냐 단 잠자린 어디냐 * 누리 : 세상 * 단 잠자리 : 편안한 잠자리 광복 전에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오시기까지 선친은 소작농이었다. 선친은 살아 계실 때 늘 고향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선비가 빚어 준 막걸리를 드시어 취하시면 눈물로 고향 이야기를 토로하셨고 선비도 함께 우시었다.
누구이 허수아비 비웃으면 불이 솟고 대밭에 우뚝 솟은 대나무는 봄이 한창 이 여름 누구는 울고 또 누구는 웃었는가 * 누구이 : 누군가가 * 갈걷이 : 가을 걷이 * 결잠 : 겨울잠 아무리 과학만능 시대라 해도 허수아비를 비웃으면 안 된다. 그가 온 여름 벼를 지켜낸 일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누렇게 머리 숙인 삶내음 좋고 좋네 갈걷이 끝나면 짐승들은 결잠 드니 언제면 이어진 된마 다 함께 지내냐 * 삶내음 : 벼내움 * 갈걷이 : 가을걷이 * 결잠 : 겨울잠 * 된마 : 북남(남북) 비무장 지대에 사는 짐승, 벌레들은 자유로이 무상출입을 하고 바닷고기도 그러하다. 그런대 우리는 어째서 맘대로 오갈 수 없는가? 한 겨레인데.
늦더위 지나가면 먼 메는 높은 하늘 가람 바람 가볍고 갈쪽 바람 오고마는 올해도 뒷마 사이를 번개만 치느나 * 가람 바람 : 강바람 * 갈쪽 바람 : 서쪽 바람 * 뒷마 사이 : 남북 간 재일동포들에게는 춘하추동 자나 깨나 늘 서쪽에 맘이 끌렸다. 고향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서쪽서 불어오는 맵짠 바람조차도 정답고 상냥하고 그윽하다. 고향에서 불어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향은 그립고 또 그리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백범 스승님이 말씀 하셨듯이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참된 ‘우리나라’가 되고 내 고향이 있다고 실감된다. 언제면 그날이 올까?
내려 온 백두 삼동 치오르는 고향 생각 깊어가는 개마고원 겨울 찾는 가야산 그 날이 오느니 앉아만 있을건가 * 백두 삼동 : 白頭 三冬
어마닌 온 여름을 미르님 모셔서 물놀이 가자마라 가까이 하지마라 그래서 다 늙으셨고 덜된 놈만 남았구나 * 미르님: 용왕 우리 어머님은 젊으셨을 때 3일 사이에 큰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을 다 잃으셨다. 내 형 셋은 다 못에 빠져서 죽었다 한다. 그래서 큰딸인 누님만 살아남았기에 어머님은 나에게 늘 못이나 가람가에 절대로 가지 말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타이르시었다. 그 어머님도 지금은 저승 분이되셨다. 이국살이란 이런 슬픔이다.
아버님 남겨 가신 빛바랜 밀짚갓은 예순 해 옛날 돋워 목소리 쟁쟁하니 일흔된 이 못된 놈은 머리만 파뿌리네 * 밀짚갓 : 밀짚모자 우리 아버님은 살아 계실 때 여름이면 줄곧 밀짚갓을 쓰고 다니셨다. 또 한국에서 들어 온 밀짚갓이야 말로 참된 갓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었고 그때면 우리 자식들에게 고향 이야기를 많이 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