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가람기자] 변강쇠전 이야기는 이렇게 이루어 진다. 평안도 월경촌에 옹녀라는 여자가 있었다. 열 다섯에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데, 매년 계속 개가하나 매번 죽는다. 스무 살에도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이 여자를 자꾸 범하는 일이 벌어져, 동네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결국 동네에서 쫒겨나고, 이어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궁합을 본 뒤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다 궁합이 잘 맞아 삼남지방을 유람하면서 변강쇠가 일은 아니하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다 죽을병이 들게 된다. 이들은 어느 날 한 주막에서 지리산 뱀사골의 고로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뱀사골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와 고로쇠물을 마시며. 병을 치료하며 살았던 곳이 들독골이라고 전한다. 이후 병이 완쾌되자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며. 힘자랑을 했다고 하며, 그 들독이 있다 해서 들독 골이라 한다. 병이 낳은 후 백장계곡에서 살게 된다. 게으름을 타고난 강쇠, 산속에 들어와서도 피둥피둥 놀기만 하여 땔꺼리 조차 없어, 하루는 옹녀가 나무를 해 오라 했다. 낮잠만 퍼잔 강쇠는 해질녘 길가의 장승을 뽑아 와서 땐다. 이 일로 전국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한뒤, 변강
[그린경제=가람 기자]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한우물이라는 마을이 있다. 남원시내의 한켠 서북쪽에 우뚯 솟은 교룡산 자락의 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로 방죽과 큰 샘이 자리한다. 지금은 방죽은 메워 농토가 자리하고 있지만 수십년전만 해도 낚시꾼들이 모여들던 방죽이었다. 옛날 한우물마을에는후처와 아들 3형제를 둔 심성고운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농부는 피로에 지쳐 길가에 쓰러진 한 나그네를 구하게 된다. 오랜동안 정성을 다하여 몸이 완쾌할 즈음인데,그 나그네는 어디론가 흘쩍 사라져 버렸다. 그후 세월이 흘러 두어 해가 지난 어느날 그 말없이 떠났던 나그네가 농부를 찾아왔다. 지난날 저의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인사도 못드리고 사라져 버렸던 나그네를 기억하시냐며, 그간의이야기를자초지종의 이야기한다. ▲ 한우물 전설의 고장 표지석 본인은 지관인데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곳 마을 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엄청난 명당을 찾았단다. 그래서 긴장이 풀린탓인지 그간의 고생에 지친나머지 병을 얻어 쓰러지게 되었는데, 은인께서 날 구해주었다며, 죄송해 하였다. 병이 완쾌될 무렵 그는 명당문제로 너무 큰 고민속에 말도 없이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최영장군 묘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자락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 장군의 묘는 그의 아버지 최원직묘의 아래에 그의 부인과 함께 모셔져있다. 묘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빈약하여 위에 있는 묘가 누구의 묘인지 아래있는 묘는 또 누구인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게 되어서 너무도 안타깝다.
[얼레빗=가람 기자] 남원은 남방의 근원이 되는 천년의 고도다. 특히 남원은 기록물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알려진 춘향전, 흥부전, 최척전(홍도전), 변강쇠전 그리고 만복사저포기 등의 고전은 물론, 전북권의 문집 중 남원 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70%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니 남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록문화의 보고라 하겠다. 그 중 대표적인 남원의 기록물은 용성지이다. 용성지는 다른 기록물과는 다르게 남원에 관한 종합보고서이다. 개인의 문집은 개인의 경험과 행적만 기록되었지만 용성지는 그것을 모두취합해서 균형있게 편집했다는 뜻이다. 서남대 이현식교수의 남원문화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용성지』 편찬과 체제는 조선 조정에서 만든 『여지승람(輿地勝覽)』, 지방에서 만든 평양의 『평양지』나 순천의 『승평지』 등의 영향을 받았다. 『여지승람』은 성종 때(1481년, 성종 12) 처음 만들어진 후에 중종 때(1530년, 중종 25) 증보되고 숙종 때 다시 증보되었는데, 숙종 때의 자료가 『용성지』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 ≪용성지≫ 표지와 속지 『용성지』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차례 편찬되고 여러 차례 보완되었다. 1699년(숙종 25)에 남원부사 이구징(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