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물관을 찾은 많은 분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전시실이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인 ‘구석기실’입니다. 심지어 일부 관람객은 “전시실에 누가 자갈돌을 가져다 놓았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관람객의 관찰이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갈돌로 만들어진 점이 우리나라 구석기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처음 확인되어 이제는 전국에서 출토되는 주먹도끼는 자갈돌을 재료로 삼았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갈돌을 깨뜨려 다듬어서 주먹도끼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두들겨 치거나 깨뜨리는 타격 기술은 인류 첫 돌연장인 찍개에서부터 이용되었습니다. 진열된 주먹도끼나 찍개는 크기도 하고 모양이라도 있으니 도구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구석기실 마지막 장을 차지하는 작고 길쭉길쭉한 돌날은 도대체 어떻게 쓰였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단박에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앞선 시기의 주먹도끼와는 견줄 수가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길이는 5㎝ 이하이고, 너비는 0.5㎝ 안팎으로, 길이가 너비의 2배를 넘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날’이라 부르며, 세석인(細石刃)ㆍ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개성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아름다운 청자 주전자와 받침입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이 이 주전자에 담긴 술을 서로 따라 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절로 상상되는 작품입니다. 색은 맑고 푸르며, 표주박 모양 주전자와 대접 모양 받침이 한 벌을 이룹니다. 푸른 배경 위에 까맣고 하얀 무늬가 눈에 띄며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가 돋보입니다. 주전자는 술, 물 등의 액체를 담아서 따르는 용도며, 받침은 주전자를 받쳐 주전자에 담긴 액체를 보온하는 등 기능적인 역할을 합니다. 완벽한 조합과 독특한 표현 기법, 자유분방한 무늬가 특징인 이 주전자와 받침은 201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완벽한 구성과 형태의 아름다움 이 작품은 주전자, 그리고 주전자 뚜껑, 주전자를 받치는 받침이 하나의 꾸러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청자 가운데 주전자는 상당히 많은 수가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뚜껑과 받침까지 완전한 하나의 꾸러미를 갖추고 있는 예는 드물어 이 청자가 더욱 값어치 있게 느껴집니다. 주전자는 표주박 모양[瓢形]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식물이나 동물, 인물 등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청자를 상형청자(象形靑磁)라고 하는데, 이 주전자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세걸(曺世傑, 1636~1705 이후)의 와룡담(臥龍潭)ㆍ농수정(籠水亭)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에 실린 그림입니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지금의 강원도 화천 용담리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방화계(傍花溪),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백운담(白雲潭),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台)를 일컫는 지명입니다. 화첩을 그리게 한 주인공인 유학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일찍이 6곡인 ‘와룡담’ 골짜기에 숨어 들어가 정자를 짓고 살았습니다. 농수정은 그 정자의 이름이며 <농수정> 그림은 ‘와룡담’ 계곡과 정자를 근경에서 자세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곡운은 김수증의 아호이기도 하고, 화천군 용담리 일대의 원래 명칭인 사탄(史呑)을 주희(朱熹)가 머문 무이산(武夷山)의 ‘운곡(雲谷)’을 따라서 ‘곡운(谷雲)’으로 김수증이 바꿔 부른 것입니다. ‘와룡담’은 구곡 가운데 제6곡으로 가장 뛰어난 절경으로 손꼽히며 김수증은 화룡담 상류가 모이는 귀운동 골짜기에 7칸짜리 띠풀 집을 짓고 곡운정사(谷雲精舍)도 운영하였습니다. 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전통을 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진연의궤 《진연의궤》는 51살이 된 고종의 망육순을 기리기 위해 1902년 11월 4일부터 9일까지 경운궁의 중화전과 관명전에서 치른 잔치를 기록한 책입니다. ‘진연’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를 말하지요. 진찬(進饌)ㆍ진작(進爵)ㆍ진풍정(進豊呈) 등도 같은 의미입니다. 의궤는 반차도 등의 그림을 수록한 권수(卷首)와 본문에 해당하는 권1, 2, 3으로 엮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전통을 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진연의궤입니다. 대한제국 시기 황실 축하 잔치의 면모를 살필 수 있고 황실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고종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02년 11월 고종 망육순 기림 진연 고종은 1897년 7월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습니다. 황제국에 걸맞은 체제를 갖추어 위상을 높이고자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무한한 권력을 가진 황제권을 명문화하였습니다. 또한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맞이한 1902년은 고종 황제가 육순을 바라보는 51세가 되는 해였고[망육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해였으며, 즉위한 지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그림에 대한 평이 적힌 이 작품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입니다. 그림에 대한 평(評)을 쓴 사람은 조선 후기 사대부 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지요. 그림과 글이 거의 같은 비율이어서 그림과 글씨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강세황의 글씨는 아름다우면서도 격조가 있습니다. 오른쪽의 그림을 먼저 살피겠습니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가장 멀리 거칠고 험한 느낌의 봉우리들이 보이고, 중간에 먼 산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산자락이 보입니다. 산 밑에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시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화면 오른쪽 밑으로 좁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고, 소를 몰고 오는 목동이 아주 조그맣게 그려졌으며, 가을철 추수가 끝난 뒤를 암시하듯 커다란 노적가리가 보입니다. 그림으로 미루어 여기는 아늑한 뒷산을 배경으로 한 추수가 끝난 어느 마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호젓하고 조용한 느낌입니다. 진경을 그릴 때 중요한 점 그림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읽어 내기는 좀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글에 대해서 살펴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만 년 전 무렵에는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여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다 자원의 이용은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양 오산리 유적, 창녕 비봉리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 등 한반도 각 지역의 바닷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신석기인들이 식량으로 이용했던 각종 어류와 바다 포유류의 뼈, 패류 껍데기가 발견됩니다. 또한 식량을 얻기 위해 사용했던 낚시와 작살, 그물추 등의 도구, 배와 노 등도 발견되어 당시에 어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인들의 먹거리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있습니다. 바닷가 유적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들이 쌓인 조개무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과 다양한 동물 뼈 등으로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살았는지, 또 어떠한 방식으로 먹거리를 확보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조개무지 유적에서는 조개, 굴 등의 패류 껍질과 참돔, 다랑어, 삼치, 대구, 방어, 복어 등 다양한 어류의 뼈, 강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17~18세기 영ㆍ정조 연간에 제작된 조선백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왜란(1592~1598)과 호란(1636~1637)의 피해를 극복하여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회복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 제2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입니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달항아리를 조선백자의 알맹이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입니다. 조선의 이상과 세계관을 담은 백자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습니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 생활과 생업 활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설명카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가운데 많은 유물이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1974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견해를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가 수습되었고 이후 발굴에서도 새로운 자료들이 연이어 확인되는 등 역사ㆍ학술적 값어치를 인정받아, 1976년 사적(면적 546,908㎡)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 발굴과 연구 성과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1호 돌널무덤의 발견 1974년 4월 국립박물관은 부여 초촌면 현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나갑니다. 조사팀은 판석 위에 큰 돌이 얹어져 있었다는 주민의 상세한 설명에 이미 도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표를 제거하고 덮개돌을 들어 올린 뒤 흙을 제거하다 보니, 예상과는 달리 동쪽 벽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서울의 동북쪽인 경기도 양주에 한 때는 삼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컸던 회암사(檜巖寺) 터가 있는데, 중심 전각인 보광전(普光殿) 터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 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여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수막새 가운데 범어인 ‘옴’자가 있고 글자 좌우에 효령대군’이, 하단에 ‘선덕갑인오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를 설명하면, ‘효령대군(1396∼1486)’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둘째 형으로 불교를 옹호한 대표적인 왕실 인물이고, ‘선덕’은 중국 명나라 선종(宣宗, 재위 1426~1435)의 연호로, 선덕연간 중 갑인년은 1434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수막새는 1434년 5월에 제작되어 보광전 기와로 사용되었으며, 효령대군은 수막새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보광전 불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왕자 이름이 왜 사찰 수막새에 등장했을까? 조선시대의 특징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공식처럼 외워왔는데,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인 대군이 무슨 연유에서 절 수막새 제작에 관여했을까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서예실에 비석 한 기(基)가 서 있습니다. 몸체가 둘로 깨어져 위아래를 붙인 이 비석은, 모습도 표면도 세월의 흔적에 닳아 있습니다. 천년을 넘어간 세월을 지낸 이 비석의 이름은 <태자사 낭공대사비(太子寺郎空大師碑)>입니다. 원래 이름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이며, 세상 사람들은 ‘백월비(白月碑)’라고도 부릅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가 있던 시대) 낭공대사(郎空大師, 832~917)의 탑비입니다. 태자사와 탑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고 오로지 대사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만이 남아있습니다. 나라와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국사, 큰 스승 낭공대사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비석에는 그의 85년의 인생, 불가의 연과 수행자로서, 학승으로서, 그리고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61년의 승려로서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글은 낭공대사의 입적(入寂) 한해 뒤에 최치원의 동생이자 신라 말 고려 초 최고 문장가 최인연(崔仁㳘, 868~944)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비석이 세워진 것은 고려 광종 5년, 낭공대사가 죽은 뒤 37년 후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