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과자(京菓子, 쿄가시)라는 것이 있다. 천년고도 교토에서 만드는 일본과자를 그렇게 부르는데 서양과자와 구분하려고 부르는 화과자(和菓子, 와가시) 중에서도 교토에서 만드는 과자를 특별히 그렇게 부른다. 일본인들이 갖는 교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과자에도 나타나있다. 일반적으로 경과자는 5감으로 맛보는 과자로 알려졌는데 “눈으로 색이나 형태를 즐기고 혀로 감촉과 맛을 즐기며 코로는 향기를 느끼고 귀로는 과자의 이름을 듣는다.”라는 말처럼 과자 하나하나가 손으로 만드는 예술품으로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경과자의 역사가 천 년을 넘는 것은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 왕성(王城)과 귀족들이 즐겨 먹은 데다가 신사와 절이 많아 제단에 바치는 일이 많았고 또 다도(茶道)의 융성도 한몫을 거들었다. 특히 교토의 맑은 물을 경과자와 관련시키는 사람도 많다. 교토 시내 시죠도오리에는 올해로 창업 208년을 맞아 7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메야요시나가(龜屋良長)라는 경과자점이 있다. 1988년까지 가족끼리 하다가 주식회사로 만들어 종업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과자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자를 기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경과자의 특징은 모두 손끝에서 완성되는 철저한 도제식
국화, 오동나무, 아욱꽃, 매화, 소나무, 떡갈나무... 마치 식물원이나 정원의 꽃나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이런 모양으로 도안된 무늬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가문(家紋, kamon)이라한다. 일본은 우리처럼 족보가 없는 대신 집안을 나타내는 문양(紋樣)이 있는데 이는 가계(家系), 혈통, 문중, 지위를 나타내는 문장(紋章)으로 약 5천 종이 있다. 가문의 무늬는 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같은 자연물도 있고 거북이나 매와 같은 동물 모양도 있는데 가장 많은 가문은 식물이 37종, 우산, 수레, 부채모양이 27종, 까마귀, 학, 비둘기 같은 새 종류가 7종 등 다양하다. 가문의 역사는 천여 년 전인 헤이안시대 (平安時代, 794-1185)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역사상 가장 평안(平安)하고 문화가 찬란했던 시대인 이 시대의 귀족들은 가마나 입는 옷에 무늬를 그려 넣길 좋아했는데 이것이 발전 되어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1333)로 오면 싸움으로 날을 새는 무사시대인 만큼 가문은 커다란 깃대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적과 아군을 구분 짓는 징표로 유행하게 된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죽고 난 도쿠가와 시대에는 수백 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지난 5월 15일은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아오이마츠리’ 날이었다. 3대 마츠리로는 7월 한 달 동안 하는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3대 마츠리 가운데 한 가지를 보러 간다면 단연코 ‘기온마츠리’를 추천하고 싶다. 가장 생동감이 있을 뿐 아니라 서민적이고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토신문의 아오이마츠리 홍보기사에는 연간 300건이 넘는 마츠리 가운데 최고 마츠리로 아오이마츠리를 꼽고 있다. 가모마츠리라고도 부르는 아오이마츠리의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점괘는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왔다. 점쟁이인 우라베(卜部伊吉若日子)의 조언은 튼실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는 얼굴에 동물 가면을 쓰고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사(마츠리)의식을 행하면 풍수해를 잠재울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고대에 기원을 둔 마츠리는 대부분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작 등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아오이마츠리 역시 풍수재해 예방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아오이마츠리를 주관하는 가
≪왕생요집(往生要集、984年)≫을 써서 헤이안시대 유명한 승려로 자리매김한 원신 (源信, 942-1017)스님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9살에 히에이산(比叡山)에 맡겨져 승려의 길을 걷게 된다. 어머니의 간절한 불공 덕인지 15살의 원신스님은 무라카미왕(村上天皇)의 신임을 얻어 왕실법회를 맡을 수 있는 엘리트 강사로 발탁되는데 이때 무라카미 왕은 원신스님에게 면포 등 두둑한 하사품을 내린다. 뛸 듯이 기뻐하며 원신스님은 첫 왕실 출입으로 받은 귀한 물건을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들뜬 마음으로 보낸다. 그러나 아들이 보내온 왕실 하사품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어머니는 원신스님께 되돌려 보내면서 한 통의 편지를 담아 보낸다. “보내주신 물품은 기쁘게 받았습니다. 왕실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학승이 되었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그러나 왕실 출입을 계기로 여기저기 유명 강사로 불려다녀 세속적 고승(高僧)으로 화려한 대우를 받고 그럭저럭 지내라고 출가시킨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미 늙어서 이제 얼마 살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대가 성인(聖人)이 되어 나를 보러 온다면 나는 그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며 원신
[프레시안 books]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기사입력 2011-04-29 오후 6:35:05 한국 사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라는 글이 아무렇지 않게 떠다니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침략의 원흉이 아니라면 조선의 구세주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건 마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은인일 수도 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식자층에서 왜 모를까? (☞관련 기사 :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재일조선인 인권평화운동가 서승이 "후쿠자와에 대한 표피적이고 맹목적인 긍정론을 우려한다"라고 일침을 가하는 가운데, '아시아 침략의 선동가'로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대로 들여다 본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가 번역 출간되었다. 1만 엔 권의 모델로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스승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신격화한 대표적 인물로 도쿄대학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년)를 꼽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는 마루
한 점 불빛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한 좁고 더러운 조선인 구역 지나 어두운 밤길을 인력거가 여관방을 향해 달린다 나는 무엇이 좋아 동경의 화려한 네온을 뒤로 하고 조선 땅에 와 있는가 도서관도 없고 강연회도 변변한 음악회도 없는 땅 메이지 40년(1907) 봄 3월 더럽고 누추한 경성에 온 것을 후회하는 총독부어용신문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 동양척식회사 땅 3정보 공짜로 빌려 8년간 사과 농사지을 땐 한몫 잡자는 뜻이었겠지 조선인이여! 조선과수사업을 번창케한 구즈미의 공적을 잊지마라 이 달콤한 사과 향기 조선은 깊이 그리고 길이길이 기억하라 외치지만 그 과수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구즈미 구니카쿠의 애플, 이윤옥 시 - 조선의 과수사업을 번창케 한 구즈미를 조선인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글을 쓴 야마가타 이소오(山懸五十雄)(1869~1959)는 시가현(滋賀縣)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엘리트. 형 (山縣悌三郞)이 만들던 소년원(少年園) 잡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소년문고(少年文庫), 만조보(万朝報)등의 영문담당 기자를 거쳐 경성의 총독부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ソウルプレス) 사장에 취임한다. 이 시절 '경성에는 기생
지난여름 나는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안내 겸 통역을 맡아 천년고도 교토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일행 중에 고대건축을 공부하는 분이 있어 일본 불교건축의 최고라는 뵤도인(평등원, 平等院)을 보러 교토 남동쪽에 있는 우지시(宇治市)에 갔을 때였다. 일본 돈 10엔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진 뵤도인은 백제계 도래인 후지와라(藤原)가문과 관계가 있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로 뵤도인 앞에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연못 속에 비친 건축물과 푸른 소나무의 휘늘어진 자태는 한폭의 그림 같아 건축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볼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한국 여행사들도 앞다투어 뵤도인을 새로운 코스로 집어넣고 있어 한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다. "두 분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뵤도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친 기모노 차림의 두 여인과 우리 일행은 신호등 앞에서 만났다. "기레이데스(아름답다)"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만 보면 다가가 이 말을 건넨 사람은 모 잡지사 문화부 최 기자로 그 덕분에 우리는 일본전통 옷차림의 많은 여인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름답다, 예쁘다"라는 말은 여성을 꼬시는(?) 세계 공통어일뿐 실제 모습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나듯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다 / 13년간 탐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스승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멀고먼 땅 청나라에서 구한 책/ 눈물로 마주하며 스승과 주고받던 사랑/ 추사 선생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상적의 마음을 그린 것/ 대정고을의 가득한 푸른 솔향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라. -추사 유배지에서 ‘이한꽃’- -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씨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난단다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단다 / 13년간 까닭 없이 외로운 땅 탐라도 / 내동댕이쳐진 스승 그리며 / 먼 땅 청나라에서 스승께 드릴 책 한 짐을 지고 왔단다 / 눈물겨운 추사 선생 /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이상적 마음을 그린 것이란다 / 그 이름 만고에 남는 것은 / 고독한 스승을 돌본 갸륵함 때문이라고 / 후세 사람들 아낌없이 입을 모은다. -이한꽃 시 ‘이상적 님’-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
동해 한 점 외로운 섬 독도 고래로 우리가 지켜 온 섬 어느날 오천년 종묘사직 부수고 나라 삼키더니 나가사키 히로시마 폭탄 맞고 되찾은 국토 무슨 심보로 자기땅이라 우기는 가 금세기에 나라 잃고 찾은 반쪽 광복 서럽다해도 그 외로운 섬 우기는 일 더욱 서러워 아! 세상사람들이여 어찌 이 노릇에 침묵하는가! 날강도의 국토 침탈에 어찌 눈감는가! 일본의 지식인들이여 어찌 침묵하는가! 강제로 땅 뺏어 코흘리개 어린애들 책에 실으면 참 역사 바른역사 되는 줄 알지만 하느님은 안다네 그런 억지 그런 생떼 천벌 받아 마땅한 죄 국토 강탈 독도 강탈. ------------------------------------------- 지진참사 와중에도 독도 야욕 드러낸 일본 [논단] 일본은 독도를 교과서에 싣겠다는 선전포고를 즉각 중단하라! 이윤옥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국 방송은 일본처럼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24시간 보도 체제로 들어가 경쟁이 치열했다. 지금도 일본 재해 지역의 보도를 시시각각 전하고 있을 만큼 이번 대재앙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크다. 가족을 잃은 사람, 집과 직장을 잃은 사람은 물론이고 아예 마을 자체가 싹쓸이된 모습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