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김충선으로서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곤장을 선택하셨단 말입니까?” “피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애대감이시라면 충분히. 하지만 그리 하지 않으신 내면의 이유를 말씀 올린 겁니다.” 김충선은 시선을 이순신에게 돌렸다. “소생은 서애대감을 방문하여 이번 사단(事端)의 진상을 파악하고 명나라 사신에게 조치를 하고자 하옵니다.” “단지 경고이더냐?” “사살할 것입니다.” 이순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자를 나 역시 잡아다가 처형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그래도 명나라 사신이 아니냐? 아직은 명나라와 대립이 어렵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은.” 이순신의 결론에 대해서 김충선과 항왜들은 맥이 풀리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러나 정도령은 다른 견해를 이야기 했다.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헌을 처단하소서.” 정도령에게서 이런 강력한 요구가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기에 전원의 시선이 모아졌다. 정도령은 소용돌이치는 정국에 대해서 요점을 짚었다. “사헌을 죽이면 명나라는 흥분할 것입니다.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조선입니다. 일본은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별로입니다.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 김충선이 목소리를 깔았다. “상감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은 아닌지 해서요.” 원균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혹시 통제사와 영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요?” “그것이 아니라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상을 그 지경으로 방치한 것은 임금의 의도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한양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소생이 행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균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임금이 의심을 품기 시작 했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파격적 국면으로 접어들 게 되는 것이다. 명량으로 인하여 조선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성의 신망이 이순신에게로 결집 되었으며 조선의 수군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 역시 사기가 충천하였다. 명나라의 시선도 확 달라져 있었고 일본은 치명적 타격을 당하여 인사불성(人事不省)에 초상집 분위기였다. “조선의 기운이 우리에게 오고 있소.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 분명하오. 하늘의 의중을 김장군이 살펴보고 오시구려.” “그리하겠습니다.” 김충선은 이순신과 정도령을 기다리지 않고 동료 항왜 서아지와 준사를 동반하여 그 길로 한양으로 출발하고자 준비했다. ‘사헌을 우선 잡아 죽여야겠다.’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쾅! 쾅! 원균이 책상을 내리치자 김충선도 힘껏 내리쳤다. 단단하게 박달나무로 만든 서궤(書几)가 금방이라도 부숴 질 것만 같았다. “이런 법이 있습니까?” “당장 한성으로 달려가 명나라 사신 사헌이란 작자를 요절내야 합니다.” 한양으로부터 들려온 소문은 김충선과 원균 등의 장수들을 동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나라 사신에게 곤장을 맞은 유성룡은 업혀서 실려 나갔다고 했다. 한 동안 공무를 수행할 수 없으리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마침 이순신과 정도령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의 협상을 위해 출타 중이었다. “진제독 역시 명나라 놈 아니요?”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무섭게 끓어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보잘 것 없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일개 병부주사가 일국의 영상을 욕보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만행입니다.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어요.” 김충선이 장검을 쥔 손을 부르르 흔들었다. “사헌이란 사신이 그리 기고만장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내가 상소를 올리고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서 그 명나라 사신 놈을 토막 내 버릴 테요!” 원균은 손을 번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원사웅은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찐 감자 여러 개와 노랗게 익어 맛있게 보이는 옥수수가 전부였으나 전란 중이라 이것도 감지덕지일 게다.원사웅은 손수 감자를 하나 꺼내서 여인에게 건넸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손을 내밀어 받았다. 전혀 일을 해보지 않은 맑고 귀한 손이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상놈이나 여종 노릇을 하던 여인은 아닌 듯 했다. 바닷바람에 살짝 날리는 머릿결이 참으로 고왔다. 원사웅은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갈매기들이 떼 지어 날아가는 그 곳에 장엄한 빛이 황홀할 정도로 아찔하게 펼쳐져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려.” 원사웅은 대자연에 심취하여 중얼거렸다. 여인의 고개가 원사웅의 어깨 위로 살포시 기대왔다. 아찔한 동백꽃 향기가 콧등을 자극했다. 갑자기 심장이 무섭게 박동하고 피가 요동치며 얼굴이 화끈 거렸다. ‘이것이 무슨 증세인가?’ 원사웅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뻗어서 여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하늘에는 태양을 품은 노을이 있고, 땅에는 사모의 정을 품은 남녀가 있었다. 파도소리는 아득하게 들려오고 젊은 남녀의 피는 뜨겁게 흘렀다. “난 원사웅이라 하오. 낭자가 입을 열지 않으니 내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잠시만 기다리게. 다 끝나가는 판이니까.” 선전관 조영은 다시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때 섬뜩한 무엇인가가 조영의 뒷목을 관통했다. “기다리고 싶지 않다. 개자식아.” 날카로운 칼끝이 조영의 목 아래서 반짝였다. 핏물이 그 칼끝을 타고 흘러내리자 사태를 눈치 챈 창기가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내려는 순간에 오표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의 눈이 아닌 것 만 같았다. “쉬이.” 오표는 조용히 입을 다물라는 시늉을 했다. 여진의 창기는 온 몸이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비명은 입안으로 삼켜졌다. 그녀는 실로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배 위에 상체를 얹고 있는 사내의 목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그녀의 젖가슴과 배를 흥건히 적셨다. 여진의 창기는 오표가 사라진 한참 동안을 그 자세로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 걸?” 아란은 귀가한 오표를 보고는 대뜸 지목했다. 오표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은혜를 갚았다.” “누구의 은혜?” “너를 구해준 조일인 김충선. 그 김충선을 노리고 있는 자를 내가 제거했으니 널 구해준 인사는 한 셈이지.” 아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피, 내 은혜는 내가 갚을 것이야. 오빠는 날 조선으로만 데려가줘.”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일패공주는 오표에게 경미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를 꺼냈다. “죽여야겠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은 본래 죽여 없애는 것이 상수잖아.” “......!”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어차피 장예지의 존재만 이 땅에 없다면 기회는 있을 테니까.” 일순간 오표는 머리끝이 쭈뼛했다. 장예지는 아직도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녀를 암살하려고 했을 때 공교롭게도 광해군이 등장하여 훼방을 놓았었다. 그런데 오표가 사실을 발설하려는 순간에 다시 일패공주가 중얼거렸다. “장예지를 영원히 찾을 수 없다면 김충선도 사람인데 내게 기회를 주겠지.” ‘공주님은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 여자인 줄 모르고 계십니다. 어디에 숨어 있어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분입니다. 향기도 최고이며 미소도 우아합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고고함과 싸늘한 매력은 독보적입니다. 오표는 그래서 노예로 살아갈 겁니다.’ “안 그런가? 오표?” “그......럴 것입니다.” “칸은 확실히 나보다도 위대하셔. 우린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근자에 조선은 다시 재미있게 변하고 있잖아.”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패공주는 제법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동행자가 있었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아란은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오표의 동공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조선으로 다시 간다면 날 데리고 떠나줘. 그리고 김충선, 그와 재회할 수 있게 도와줘.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 오표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누이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냥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란의 태도는 그 이상이었다. 일패공주가 김충선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오표는 너무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충선과 장예지의 관계 또한 어떠한가? ‘김충선, 이놈이 여자 복은 대단한 모양이다. 아주 타고 난 것이야. 만나본 여인들은 누구라도 호감을 갖게 만들다니! 여자를 유혹하는 솜씨가 조총을 다루는 것 이상인 모양이다.’ 오표는 생각했다. 같은 사내로서 부러움도 생겼다. 일패공주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은 늘 감춰진 애정이다. 인내하는 사랑이란 언제나 괴로운 법이다. 그럼, 이제 김충선을 떠나보낸 일패공주는 또 얼마나 고통 속에 잠겨 있는 것일까? “동생은 어때?” 오표가 일패공주의 처소를 방문하자 가장 먼저 묻는 말이었다. 오표는 솔직히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오표는 전혀 이러한 만남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누이동생 아란과의 해후는 상상하지 못했던 기쁨이기는 했다. “오빠...... 맞구나.” 아란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오표는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고향의 냄새가, 그리운 냄새가 온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미안하다. 아란.” 아란은 울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지난 7년간의 그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난감할 뿐이었다. “아니야. 살아 돌아 와줘서 고마워. 오빠의 소식은 일패공주님을 통해서 들었지.” “넌, 넌 어떻게 지낸 거야?” 아란은 총명하고 이해력도 빨랐다. 그녀는 자신이 일패공주에게 붙들려오게 된 경위를 차근차근 이야기 했다. “김충선이란 사람을 만났어. 그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야.” 김충선이 내 누이를 살렸다? 난 그의 여자 장예지를 노리고 있었는데......? 아란은 김충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되어 습격한 일과 그가 오히려 조선인이면서도 자신을 취조하면서까지 여진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취조 도중에 오표의 본명 아표가 밝혀지면서 공주 일패의 도움을 받고 있게 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 했다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김응서는 장예지가 여자임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내력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김응서가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은 광해군의 행적이었다. 중도에서 일본군 주력부대나 패잔병들, 혹은 척후병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고 만다.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선 도원수부로 가야겠소.” 광해군은 진도의 우수영에 대하여 방문을 우선 계획했었다. 명량대전의 공로를 치하하고 이후의 함대운영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성룡의 장형 사건으로 행선지를 바꾼 것이다. “통제사로부터 장계는 올라오지 않았소. 명량의 공로가 있는 장수들의 명단 역시 아직은 모르오. 하지만 내 짐작으로 거기 김충선 장군이 틀림없이 들어 있을 것이요. 이순신에 대한 충정을 내가 좀 알지요.” 광해군은 장예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장예지는 묵묵히 호위무사로서 거리를 두고 수행을 할 따름이었다. 광해군이 사부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가를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제 우수영으로 가면 김충선장군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사부가 그립지 않소?” ‘그립지요. 많이! 하지만 난 그와 만나지 않겠다고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 광해군은 너무 놀라 말에서 낙마할 뻔하였다. “이럴 수가 있는가?” 명나라 사신 사헌이 영의정 유성룡의 곤장을 때렸다는 소식을 접한 세자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성대감 역시 말문이 막힌 듯 탄식만 연발했다. “영상이 그런 화를 당하시다니! 고금을 통하여 이런 사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해도 너무 하는 것이지요.” 광해군은 오성대감 이항복과 병마사 깅응서 장군 등의 수행을 받으면서 남하하는 도중 충주에서 전갈을 받게 된 것이다. 김응서 역시 명나라 장수에게 곤욕을 치룬 적이 있는지라 분개해 마지않았다. “명나라 장수들이나 사신들이 조선의 관리들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도록 합시다.” 광해군은 말을 잠시 멈추게 하고 손짓을 하여 호위병사 중 한 명을 불렀다. 약간 가녀린 체격이었으나 걸음걸이는 씩씩해 보이는 병사가 광해군의 면전으로 왔다. “서애대감이 명나라 사신에 의해서 곤장을 맞았다고 하오.” 광해군이 유성룡에 대한 소식을 호위병사에게 전달했다. 호위병사는 무척 놀란 얼굴로 탄성을 토해냈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겁니까?” 목소리가 여자였다. 장예지는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