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김병로 선생(1887-1964)은 1887년 12월 15일(음력) 전라북도 순창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와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고향 인근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할아버지 김학수가 세상을 뜨자 슬픔에 잠긴 선생은 이듬해에는 아버지까지 여의는 슬픔을 맛보았다. 외아들인 선생은 10살이 채 못되어 가장이 된 것이다. 할머니 박씨는 선생을 위해 집안에 독서당을 만들어 한문공부를 하도록 하였고, 이후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심지어 의서(醫書)와 산서(山書)까지 섭렵할 정도였다. 1899년, 선생은 4살 연상인 연일 정씨 정교원의 딸과 결혼하였다. 선생과 아버지 모두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니 이제 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을 책임져야 하였다. 한학 공부를 하며 사서삼경 중에서도 [중용]과 [대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02년 당대의 거유(巨儒)인 간재 전우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 무렵 신학문을 동경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
[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왕산 허위(許蔿, 1854. 4. 1~1908. 9. 27)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선생의 위로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요절한 둘째 형을 제외하고 맏형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이자 의병운동가였으며, 셋째 형 허겸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기에 선생의 가문은 독립운동계에서는 당당한 명문대가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의 가문 일족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 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지내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우리의 민족적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니, 특히 작은아버지와 20세 위인 맏형 허훈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1894년에 들어와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을 휩쓸게 되자, 선생의 일가는 진보로 일시 피난하였는데, 경상도 가운데서도 선산과 상주는 동학세력이 특히 강성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학자 집안이었던 선생의 일가는 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채응언(1879 ~ 1915)의병장은 평남 성천(成川)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했다. 그 뒤 이진룡 의병장 휘하 부장으로 평남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일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또한 함남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1911년 김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여 다대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후로는 부하 3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 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동삼(金東三, 1878. 6. 23 ~ 1937. 4. 13)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78번지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김동삼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안동에 많은 명문거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성 김씨 문중은 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후로 명성을 드날렸다. 천전(川前), 곧 내앞마을은 김성일의 부친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5백 년을 이어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특히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를 쏟아낸 마을이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고, 1910년대 만주 망명자가 150명을 넘을 정도이다. 선생은 안동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 김동삼 선생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퇴계학맥의 중심축을 계승한 인물인데,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이동휘 선생[1873~1935] 은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1891년경 18세 때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人)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수학한 뒤 육군 참령(參領)까지 진급하였으며, 1902년부터는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軍職)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도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의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준식민지화하자, 군동지였던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광무황제의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피체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그 해 10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08년 1월경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한성수 선생은 1920년 8월 18일 평북 신의주 고진면(古津面) 낙청동(樂淸洞) 102번지에서 한일현(韓一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韓正奎)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로 어릴 적 선생의 집안 형편은 꽤 부유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4년 3월 평북 정주(定州)의 명문 민족사립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한 민족학교였다. 이곳에서 받은 민족교육은 훗날 선생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진영에 투신하고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하다 순국하게 되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은 1941년 일본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 유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초 선생은 학도병(學徒兵)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령(朝鮮人學徒特別志願兵令)을 발표하여 한국의 청년학생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후방에서 민족지성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외형상으로 지원(志願)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경신 (1888~미상) 선생은 평남 대동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될 때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경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 안경신 선생의 유일한 사진 결사대 중 제2대에 파견된 선생은 폭탄을 직접 소지하고 평양으로 잠입하였다. 거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평양 시내에 뿌린 경고문의 영향으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있었으나nbsp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nbsp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을 파괴하였다. 선생은 당시 임신한 상태임에도 거사를 주도하였으며,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생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평양복심법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현익철(玄益哲)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으로 1911년 뜻한 바 있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래 1918년 봉천성(지금의 요녕성) 흥경현(興京縣)에 자리 잡고 많은 한인동포와 농업을 일구었다. 이 무렵 흥경현의 한인동포 인구는 무려 6만 5천여명에 달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곳의 한인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크게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흥경현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한인공회(韓人公會),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이 해에 흥경현의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아동들을 가르치면서 이들 조직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되자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굳혀 한인동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북간도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활약한 북로군정서로 널리 알려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조직으로 강력한 독립전쟁을 목표로 독립군양성과 훈련사업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서(翰西) 선생님, 무궁화 사랑을 기억합니다 -권용우- 4월 5일, 이 날은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날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신 채 1939년 4월 5일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습니다. 올해가 선생님의 76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선생님의 삶은 참으로 파란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청소년기에는 외세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들 때였습니다. 1882년 4월 미국과 한∙미 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와 한∙영 수호조약(韓∙英修好條約)의 체결을 시작으로 하여, 7월엔 한∙일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8월에는 한∙중 상민수륙무역장정(韓 ∙ 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됨으로써 외국의 선진문물이 조선땅을 뒤덮었습니다. 한편, 1884년 10월에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하여 청(淸)∙일(日)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함으로써 나라의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이들 두 나라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 싸움은 우리 조정(朝廷)을 참으로 곤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열(朴烈, 1902. 2. 3~1974. 1. 17)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선생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독부의 후원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1월 권농조합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