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동기 채백 교수가 쓴 책 《민족지의 신화》를 보았습니다. 채 교수는 오랫동안 부산대 교수로 근무하다 2022년 8월 정년퇴임 하였습니다. 내가 부산에 근무할 때 동기들 모임으로 가끔 만났던 채 교수가 책을 냈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두었었지요. 하지만 그동안 앞선 자기 차례를 주장하는 책들을 먼저 보다가 얼마 전에야 이 책을 보았네요. 아참! 책이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채 교수는 명예교수로 물러나 있었네요. 그동안 교수 정년퇴임은 선배들 이야기이지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의 일인 걸로 치부했는데, 어느새 지난해, 올해에 걸쳐 동기들이 다 강단을 떠납니다. 한 친구는 늘 학교 연구실로 향하던 발길이 어느 순간 멈추니, 우울증이 왔었다고도 하더군요. 저도 정년으로 작년에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업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근하면 기록 보고, 소속 변호사가 써온 서면도 검토해야 하며 재판에도 나가야 하니, 아직은 뒷방 신세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거~ <《민족지의 신화》 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얘기가 엉뚱한 길로 빠져들었네요. 채 교수는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을지로 4, 5가와 청계천 사이에 ‘방산시장’이라고 있지요? 서울시민이라면 한 번쯤이라도 방산시장을 가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산시장’의 ‘방산’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芳山’ - 한자로는 향기로운 꽃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왜 재래시장에 이런 이름이? 이런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있겠네요. 지금부터 그 유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산시장 앞의 청계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에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그런데 하천에는 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을 따라 모래와 흙도 흐르다가 멈추다가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멈춘 모래와 흙이 자꾸 쌓이다 보면 하천의 바닥 면이 자꾸 높아집니다. 바닥 면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홍수가 아니더라도 불어난 물이 하천을 넘어가 주변 지역은 물난리를 겪겠지요. 그래서 조선시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청계천 준설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준설공사 가운데 제일 규모가 컸던 것은 영조 때 준설공사입니다. 이 무렵 청계천 바닥 면 높이가 옆의 대지 높이와 별반 차이가 없어,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농촌에서 살기 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田間拾穗村童語(전간습수촌동어)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들이 말하기를 盡日東西不滿筐(진일동서불만광) 온종일 왔다 갔다 하여도 광주리가 안 찬다네. 今歲刈禾人亦巧(금세예화인역교)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의 솜씨도 교묘해져 盡收遺穗上官倉(진수유수상관창) 남은 이삭까지 모두 거두어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손곡 이달의 시 <이삭을 줍는 노래(습수요, 拾穗謠)>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밭고랑에는 여기저기 이삭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밭고랑에서 이삭을 줍습니다. 성경에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하였으니(레위기 19: 9, 신명기 24: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삭줍기 배려는 동서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이들이 광주리를 들고 종일토록 밭고랑 사이를 다녀도 광주리가 차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올해는 흉작인가? 시에서는 올해엔 벼 베는 사람들의 솜씨가 교묘해져 예년보다 떨어뜨리는 이삭이 적다고 합니다. 아니 동네 인심이 야박해졌나? 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부러라도 이삭을 떨어뜨렸을 텐데... 그러나 민심이 야박해진 것은 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같은 검색의 시대에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이름으로 검색해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저는 제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제일 많이 나오는 사람이 세 사람입니다. 양승국 서울대 국문과 교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리고 저입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면 좀 더 친근감이 가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이분들에게 연락하여 ‘식사 한번 하자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분들 중에 양 신부님 글은 종종 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제 이모가 양 신부님 강론하신 말씀을 카톡으로 가끔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모님 덕분에 가끔 양 신부님 강론을 보다가, 문득 양 신부님 책을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 《축복의 달인》이라는 강론집입니다. 축복의 달인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네요. 책 머리에서 양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어려움 한가운데서도 힘차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따지고 보니 결핍투성이라고 여겨 왔던 이웃들의 얼굴은 또 다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습니다. 내 깊은 상처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에 나온 노래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입니다. 이희철 어르신의 회고록 《못다 이룬 귀향의 꿈》에 나온 노래들을 음미하다가, ‘목포의 눈물’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1999년과 2000년에 목포지원에서 근무할 때 이 노래를 많이 들었거든요.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인지라, 유달산에 오르다 보면 이난영 노래비가 있고, 그 노래비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지요. 그 당시 저는 아침 운동으로 노적봉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유달산 일등바위까지 뛰어오르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어 뛰다 서다 하였는데, 나중에는 한 번도 안 쉬고 일등바위까지 오를 수 있더군요. 그때마다 이난영 노래비 앞을 지나쳤고, 오래되어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손원표 길 문화연구원 원장이 《보차공존도로》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보차공존도로’가 무엇일까요?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도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동차 전용도로나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 아닌 이상, 도로에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언뜻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공존하는 보행자와 자동차 가운데 그동안 누가 우선이었습니까? 자동차가 우선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한 번 따져봅시다. 원래 길의 주인은 사람 입니다. 그러다가 자동차가 발명되고 그 자동차가 점점 속도를 높여가면서 사람은 점점 길에서 밀려났습니다. 정책도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느냐에 집중이 되었지, 사람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사람은 자동차의 눈치를 보며 다녀야 했고, 자동차는 사람이 비키지 않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경음기를 빵빵 눌러댔습니다. 그리고 아무 눈치도 안 받고 여기저기 자동차를 주차하여, 사람들은 이런 자동차를 피해서 다녀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심해지면 반동이 오는 법. 사람들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천하의 사대부들을 안정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지식인들을 장악해야 안정적인 통치와 국정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나라는 먼저 어떤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지 몰래 살폈는데 주자학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주자를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문하에서 나온 학덕이 뛰어난 열 명의 제자들)의 반열에 올려 제사 지내고 섬기며 주자의 도학을 황실이 대대로 이어온 가학(家學)이라고 선포했다. 주자가 중국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 인물인데도 황제는 천하의 선비와 도서를 모두 모아 《도서집성》과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책을 만들어 주자의 말씀이고 뜻이라고 했다.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주자학을 먼저 차지하고,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무도 감히 자기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황제는 걸핏하면 주자를 내세워 천하 사대부들의 목을 걸터타고 앞에서는 목을 억누르며 뒤에서는 등을 쓰다듬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천하 사대부들은 그런 우민화 정책에 동화되고 협박당해, 형식적이고 자잘한 학문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주자의 학문에 흡족하여 기뻐서 복종하는 자가 있는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 지 한 반에 보통 70명이 넘었다. 그러고도 10반을 넘었으니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거짓말 안 보태고 새카맣게 보였다. 원래 4학년이 되면 남과 여반으로 나뉘었는데 내가 들어간 반은 남녀합반으로 6학년까지 그대로 갔다. 몇 학년 때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짝은 몹시 마르고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짝은 도시락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고 옥수수빵을 받아먹었다. 그런데 그 빵도 다 먹지 않고 남겨서 가방에 넣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연필이나 공책도 없을 때가 많았고 그림 도구는 아예 준비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것을 많이 썼는데 정말 아껴서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보여, 반쯤 쓴 크레용 세트와 도화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 그 애가 빵을 받아서 자리에 앉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내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고 했다. 그래도 되느냐고 하면서 짝은 너무나 맛있게 도시락을 비웠고 나는 옥수수빵을 잘 먹었다. 내가 짝에게 앞으로 종종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그 애는 그렇게 좋아했다. 나는 그 시절만 해도 빵순이었고 옥수수빵은 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임진왜란의 최대 공신을 뽑으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무신으로는 이순신 장군, 문신으로는 서애 류성룡을 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애는 당연히 1등 공신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2등 공신으로밖에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왜란과 호란 당시 적국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 되었습니다. 《서애연구》 6권에 실린 논문 <임란 극복의 주역, 류성룡 축출 과정과 그 배경>에서 류을하 박사가 이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저도 덕분에 서애 선생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과정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벽하는 서애학회의 상임위원이기도 하지요. 군역에서 빠진 양반도 병역의무를 지게 해 서애는 전시(戰時) 재상으로 오로지 나라를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면 기존 인습이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제도를 유연하게 변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시개병제를 도입하여 군역에서 빠진 양반이나 천민도 모두 병역의무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민들도 공을 세우면 면천(免賤)뿐만 아니라 벼슬까지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물작미법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국도로학회에서 《도로 이야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도로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지요. 그러니 한 사람이 다 쓸 수는 없고 도로학회 회원들이 분담하여 썼습니다. 그 가운데는 같은 공군 장교 출신이라 저와 인연을 맺은 손원표 박사도 필진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도 이 책을 보게 되었데,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는 아무래도 제가 역사를 좋아하니 도로의 역사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로마의 첫 포장도로는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 지휘하에 만들어졌네요. ‘아피아 가도’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병력과 물자만 오간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을 통하여 로마 문명이 전파되고, 로마제국 이후에도 로마 가도를 따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유럽 문명의 정체성이 유지된 것입니다. 한편 서양은 거리를 나타낼 때 ‘마일’을 쓰지 않습니까? 이게 로마의 도로에서 유래된 것이네요. 로마에서는 가까운 도시부터의 거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로마 성인의 1,000 걸음 (약 1,480m)에 해당하는 지점마다 돌기둥을 세웠는데, 여기서 ‘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