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오종실 작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에서 찍은 경복궁과 북악산 감도(ISO) 100, 셔터속도 1/160sec, 55mm, 조리개 F11, 파노라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 "세종대왕 동상이 앞에 있는데 그 뒤편에 보이는 한자로 쓰인 현판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한 말에 누리꾼 가운데는 “수도 서울 한복판 광화문 현판 한글로 바꿉시다.“라고 댓글을 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들게 복원한 거 그냥 둬라, 한자로 쓰여있다 해서 한국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댓글을 쓴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반대 댓글을 단 누리꾼들을 보면 유 장관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볼 생각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한 것도 있어 보여서 안타까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금 달려있는 광화문 한자 현판은 세종 때의 원형도 아니고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세종 때 ’원형‘을 모른 채 썼는데 그것도 훈련대장이 직접 썼던 것이 아닌 복제품이어서 그 현판을 붙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재로의 복원이 아닌 것입니다. 광화문은 한문에 능통했던 세종임금이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경복궁의 정문인데 한자로 복제품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한글은 작은 중화를 벗어난 자주 문화를 상징합니다. 많은 세계인이 광화문을 배경으로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소장 김지연)는 광화문 월대의 복원ㆍ정비를 위해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종년간에 축조된 광화문 월대 아래에서 고종년간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구의 흔적을 일부 확인하였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언론공개회를 통해 광화문 월대의 규모와 기초시설, 전체 모습 등 그간 조사가 끝낸 성과를 한 차례 공개한 이후에 추가로 한 발굴이다. 추가로 발굴한 월대 아래층에 대한 조사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기 이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해오다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물적 증거까지 처음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 조선왕조실록 속 광화문 밖 공간 활용과 관련한 여러 기록 - 광화문 밖 장전(帳殿)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였다(세종실록 97권, 1442년) 장전(帳殿) :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를 이르던 말 - 광화문(光化門) 밖에 채붕(綵棚)을 맺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하였다(세종실록
[우리문화신문=홍사내 칼럼니스트] 하나. 들어가는 말, 광화문의 유래 광화문에 대한 처음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실록에서는, 경복궁을 준공하면서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모든 궁과 성에 이름을 지어 붙이도록 하였는데 유독 광화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 보이는 글은 태조 4년(1395) 9월 29일 기록인데 여기에서는 경복궁을 다 짓고 그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그해 10월 7일 기록에서는 정도전이 ‘정문(正門)’이라 이름지어 임금께 글을 올리면서 그 이름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두 글만 본다면 정도전이 먼저 ‘정문’이라 이름지었는데, 뒤에 《태조실록》을 엮은 실록청 사람들이 실록을 엮을 당시에 바뀌어 쓰던 이름인 ‘광화문’으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정문을 광화문으로 바꾼 연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살펴보니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엮었다. 처음 태종 13년(1413) 3월에 엮었던 것을 세종 30년(1448) 6월에 정인지 등이 증보 편수하였음이 《태조실록》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세종 6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