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서낭’은 사람에게로 와서 사람과 더불어 지내면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슬프고 괴로운 삶을 어루만져 기쁘고 즐거운 삶으로 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다. 아직도 온 나라 곳곳에 지난날 삶의 자취가 남은 마을에는 서낭의 자취도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조금씩 남아 있다. 우리 고향에도 여태 ‘당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베어 버릴 때까지 아름드리 ‘당나무’가 한 해 내내 왼새끼를 발목에 두르고 서 있었고, 당나무가 서 있는 동산 위에는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며 헐어서 불태우던 날까지 ‘당집’이 있었다. ‘당집’은 서낭이 와서 머무는 집이라 ‘서낭당’이 본디 제 이름이고, ‘당나무’는 서낭이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리도록 사다리 노릇을 하는 거룩한 나무이며, ‘당산’은 서낭당과 당나무가 있던 동산을 두루 싸잡아 서낭이 노닐던 거룩한 터전이었다. 서낭을 서낭당 바깥으로 모셔 내려면 마땅히 머물 자리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서낭대’다. 정월 초나흘부터 보름까지 마을에 지신밟기가 벌어지면 풍물패 맨 앞에는 언제나 서낭이 내린 서낭대가 앞장서서 이끌었다. 초나흘 새벽 그해 당산을 책임진 산주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50여 년 전의 책이 지금까지 집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이 무더기로 버려진다. 반백 년이 지난 책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기껏 두엇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지영의《동학사》. 1973년 출판본이 주인을 몇 번 바꾸어 내게 온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이 책은 원래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왜(倭)’를 일부러 ‘복(伏)’이라 적고 있는데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것이라고 했다.(이 책의 411쪽) 이 책을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읽다가 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애써 비유를 해 본다면, 나를 칭칭 얽매고 있던 촘촘한 올가미가 한순간 썩은 동아줄처럼 허물어 내리고 정신과 몸이 공중 부양하는 듯하였다. 오랫동안 유폐되었던 깜깜한 동굴에서 뛰쳐나온 듯도 하였다. 와룡생의 무협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던가?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을지. 무협지는 버렸지만 《동학사》는 아직 못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이 책을 들춰보는데 첫눈을 맞추었던 스물두 살 때의 감동이 전혀 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 길가나 들에서 지내는 제사)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 재앙이나 병 따위 불행이 생기는 원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佛像)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수령들이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ㆍ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위는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8월 2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백성들이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무당이 하는 굿 그리고 불공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임금께 아뢰는 내용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했지만,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나라의 근본이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했으며, 그 바람에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