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당시, 우리 백성들 가운데는 왜군의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담화문을 내렸다.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에게 특별히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해서 어떠하든 공이 있으면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도 시킬 것이니 너희는 생심이나 전에 먹고 있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와라.” 이처럼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나라 문서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왜군이 알 수 없는 한글을 썼다. 이 담화문 덕분에 김해수성장 권탁은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백여 명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The Power of Hangeul in the Imjin War Moreover, if you capture Japanese soldiers or gather information on their actions, or bring back many of the capture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 4월 18일 토요일 낮 11시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3길 한글학회 강당에서는 한글의 첫 숨결을 손끝으로 느끼는 따뜻한 자리에 100여 명의 손님들이 귀한 걸음 해 주었다. 출판기념회 시작 전 네팔 세종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치다 온 한글평화대사 고은별의 귀국 인사가 있었다. 580년 전 세종임금이 백성에게 건넨 가장 다정한 첫인사, 그 124개 낱말을 날마다 손으로 적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올해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 특별한 해에 맞춰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낱말 날적이》의 퍄냄을 함께 기리고자 한 것이다. 1446년, 세종임금은 훈민정음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을 품었다. ‘어린 백성’도 쉽게 익혀 날마다 쓸 수 있는 글자이기를.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어렵고 낯선 말이 아니라, 소ㆍ벌ㆍ콩ㆍ밥ㆍ옷ㆍ실처럼 누구나 아는 생활 낱말을 골라 실었다. 부엉이의 울음소리, 범의 어흥 소리, 노루가 뛰어다니는 산천의 풍경이 해례본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낱말들은 단순한 글자 보기가 아니다. 세종이 백성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586년(선조 19년)에 안동에 사는 한 여인이 죽은 남편에게 한글 편지를 썼다. 그 여인은 바로 조선 중기 고성 이씨 문중의 며느리로 ‘원이 엄마’라고 한다. 그녀의 남편 이응태는 임신한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부모 형제를 두고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아내인 원이 엄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와 한글 편지를 무덤 속에 함께 넣어 마음을 전했다.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에는 남편과 함께 누워 나누었던 이야기부터 배 속 아이를 걱정하며 한탄하는 이야기까지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Woni’s Mother Leaves a Hangeul Letter at Her Husband’s Grave In 1586 (the 19th year of King Seonjo’s reign), a woman living in Andong wrote a Hangeul letter to her deceased husband. This woman, known as “Woni’s Mother,” was a daughter-in-law of the Goseong Yi family in the mid-Joseon period. He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자는 조선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되는 것에 비해 한글은 조선만의 글자이며 조선인만 소통할 수 있는 글자였다. 그러다 보니 한글은 조선의 비밀을 담는 글자로도 사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539년(중종 34년), 역관 주양우가 중국 북경에서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져 주양우는 나라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추국을 받았다. Preventing the Spread of Hangeul in China While Chinese characters were used in China, Japan, and Korea, Hangeul was unique to Korea and could only be used by Koreans for communication. Because of this, Hangeul was also used to encode Korea’s secrets. In 1539 (the 34th year of King Jungjong’s reign), an incident occurred where a Korean interpreter named Ju Yangwoo taug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527년(중종 22년), 당대 으뜸 학자인 최세진이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펴냈다. 《훈몽자회》에는 3,360자의 한자가 실려 있는데, 그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달았다. 그리고 이 책 시작 부분에는 ‘훈몽자회인’과 ‘범례’가 실려 있는데, ‘범례’ 끝부분에 ‘언문자모’라 하여, 그 당시 한글 체계와 용법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어려운 한자를 익히느라 애를 많이 써야 했다. 하지만 《훈몽자회》 덕분에 사대부들은 혼자서도 한자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한글은 한자 교육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Publishing Hunmongjahoe, a Guide to Explaining Hanja in Hangeul In 1527 (the 22nd year of King Jungjong’s reign), Choi Sejin,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the time, published Hunmongjahoe, a textbook for learning Hanja. The book contains 3,360 Hanja characters, with their meanings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481년(성종 12년)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뒤쳐(번역) 보급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과 중국의 책에서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1428년(세종 10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관리들은 강상죄로 죄인을 엄벌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강상죄는 죄인의 가족은 물론 죄인이 사는 지역에 이르는 사람들까지 죄를 확대해 처벌하는 엄한 벌이었다. 이에 세종은 1432년(세종 13년) 《삼강행실도》를 펴내 백성들에게 유교의 도를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문으로 설명을 단 탓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성종 때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뒤쳐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Translating the First Picture Book Samgang Haengsildo into Hangeul In 1481 (the 12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Samgang Haengsildo was translate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17년 뒤인 1460년(세조 6년)에 정책 기관인 예조에서 《훈민정음》을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자고 건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대부들은 세종대왕 사후 하급 관리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퇴출했다. 하지만 세조는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받아 한글 보급 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 뒤 실생활에서 한글이 유용하게 쓰이자, 한글 사용을 반대했던 사대부들도 한글을 모르면 불편한 상태가 되었고,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을 정식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자고 청했다. 세종대왕 때에는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했지만, 세조 때에는 예조에서 자발적으로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더군다나 하급 관리를 뽑는 시험이 아닌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해 《훈민정음》은 명실상부한 고급 관리 시험 과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Selecting High-Ranking Officials Through Hangeul Seventeen years after King Sejong had created Hangeul, in 1460 (the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449년(세종 31년), 세종은 황희와 하연을 영의정 부사로 삼았다.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백성들의 여론을 귀담아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명재상으로 불렸다. 하지만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길 좋아하고 노쇠한 탓에 일을 할 때 실수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벽에다 한글로 ‘하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마라.’라고 써 놓았다. 이 벽서를 쓴 사람은 하급 관리일 것이다. 세종이 가장 먼저 한글 교육을 시킨 대상이 하급 관리였으며, 잘못된 정책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도 하급 관리였기 때문이다. 이 벽서 사건은 백성 누구나 생각을 적어 알릴 수 있게 되었고, 백성과 관료, 백성과 백성 사이에 자기 생각을 소통시킬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Lower Officials Write a Notice in Hangeul In 1449 (the 31st year of Sejong’s reign), King Sejong appointed Hwang Hui and Ha Yeon as the Prime Minister and Vic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그 역사를 보자. 《세종실록》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다’라고 되어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25/12/30) 이후 잠잠하다가 다시 세종 28년에 기사가 나온다. 3년 동안 훈민정음에 대한 음운연구와 구체적인 시행방안 등의 연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어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진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25년 올해로 위대한 글자 훈민정음은 창제 582돌, 반포 579돌을 맞이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이 혼자 한 것이었지만, 해례본은 정인지ㆍ최항ㆍ박팽년ㆍ신숙주ㆍ성삼문ㆍ강희안ㆍ이개ㆍ이선로 등 8명의 학사와 함께 이뤄낸 집단 지성의 결과물이었다. 그런 만큼 15세기까지 이룩한 각종 학문 성과, 곧 인문학ㆍ과학ㆍ음악ㆍ수학 같은 다양한 지식과 사상이 융합 기술되어 있다. 인류 보편의 문자 사상과 철학이 매우 짜임새 있게 담겨 있다. 또 해례본은 1997년에 유네스코에 첫 번째로 오른 대한민국 세계 기록 유산이다. 섬세한 문자 해설서이면서 음성학 책이기도 하고 문자학 책이기도 하다. 15세기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으뜸 사상과 학문을 담은 책이자 현대 음성학과 문자학 그 이상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의 문화유산인 해례본이 대단한 책이라는 건 알면서 정작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원문이 한문이고, 한글로 뒤침(번역)도 대개 전문가들이 그들의 수준에 맞게 한 것이라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국어국문학과나 국어교육학과에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