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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황용주 명창 선소리 산타령의 매력은?

[국악속풀이 212] 스물세 번째 갖는 선소리 산타령 발표회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도드리의 기본형 장단과 변형장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변형 장단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곡조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이야기, 특히 영산회상 중에 6박자 음악인 상현, 하현, 염불도드리에는 변형 장단이 많다는 점, 그러나 고수의 즉흥적인 변화형이 아니고 고정되어 있다는 이야기, 긴염불과 반염불의 관계처럼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악곡들은 대개 어느 곡을 기본곡으로 하여 가락이나 장단을 변화시켰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일반적으로 긴염불에서 빠르게 연주하는 반염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 반대의 경우라는 이야기, 그 이유는 긴염불이라고 하는 곡명은 문헌에 보이지 않으며 반염불의 가락이나 템포는 관악영산회상의 염불가락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이야기, 마치 종묘제악 <희문(熙文)>을 길게 느리고 가락을 첨가하여 <전폐희문>을 만든 예와 같다고 하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 황용주 명창의 공연 모습

긴 염불과 반염불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선소리 산타령보존회》의 발표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2015년 5월 29(금) 오후 3시부터 성동구 행당동에 위치한 성동문화원에 있는 소월아트홀에서는 경기산타령과 경기민요의 발표공연이 열린다.

산타령이란 어떤 노래인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산타령이 한국의 대표적인 합창곡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장고를 잡은 모갑이의 지휘에 따라 산타령패들이 소고를 치면서 대형을 만들어 나가고 목청을 드높이기 시작하면 소리판은 후끈 달아올라 주위의 구경꾼들이 자리를 뜨지 못했던 노래가 바로 산타령이었다고 한다.

1921년도, 일본인 다나베가 한국으로 음악기행을 왔었을 때의 기행문을 보면 종로 3가 단성사(당시에는 활동소옥) 앞에는 선소리패들이 부르는 산타령 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놀랐다고 한다. 단성사 뿐 아니라 서울의 모든 영화관에서는 선소리패를 초청해 소리판을 벌리지 않으면 유지가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서울장안 사람들이 산타령을 얼마나 좋아했는가 짐작이 된다.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던 산타령이었지만, 격정의 근대사는 산타령을 점차 하향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소리 잘 하던 명인 명창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점과 다른 장르의 구경거리가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뚝섬패의 이태문 명창이나 왕십리패의 이명길, 동막패의 권춘경, 과천패의 소완준, 그밖에도 성북동패, 쇠붕구패, 애오개패, 진고개패, 방아다리패, 배오개패, 자하문밖패의 모갑이나 지역 명창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소리패를 이끌어 갈 명창이 나오질 못했다는 점과 때를 같이해 밀어닥친 근대화 물결 속에 생겨난 신파극이나 국극, 연극, 영화 등 다른 장르의 등장은 전문적으로 부르던 선소리패의 맥을 완전히 끊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60년대 말, 단절 위기의 선소리 <산타령>을 무형문화재 단체종목으로 지정하였고, 김태봉, 유개동, 정득만, 이창배, 김순태 등 5인을 예능보유자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한 종목에 5인의 보유자를 인정한 것만 보더라도 이 종목의 취약성이 얼마나 강력하게 고려되었는가 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황용주 명창과 제자들의 선소리 산타령 공연 모습

그러나 당시 인정되었던 대부분의 보유자들은 전승활동이나 후진 양성이 활발치 못한 상태에서 타계하였다. 다만 왕십리패를 이끌었던 이명길의 제자 이창배와 과천패의 소완준 소리제를 이어받은 정득만이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황용주와 최창남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산타령을 지켜가고 있으며 박태여, 염창순, 방영기, 이건자, 최숙희 등 전수조교와 “선소리산타령보존회” 회원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다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이다.

산타령의 발생과정이나 변천과정은 분명치 않다. 다만 1800년대 중반 이후, 문헌이나 사료에 사당패가 산타령 관련 악곡들을 연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불가(佛家)에서는 관련의식이 끝난 후, 산타령과 민요로 일반 대중을 위로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그밖에 도시와 농촌을 찾아다니며 넓은 마당에 불을 밝히고 구경꾼들과 함께 즐겼던 점으로 미루어 사당패의 소리를 예인집단이나 세속 음악인들이 개작하여 전승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앞산타령이나 뒷산타령과 같은 악곡의 이름은 1910년~1920년대 문헌인 《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를 비롯한 《고금잡가편(古今雜歌編)》,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신구유행잡가(新舊流行雜歌)》 등에 보이고 있어서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것으로 짐작이 된다.                  

무엇보다도 산타령은 다리밟기(답교) 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에는 서울, 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전부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밤 새워 놀았다고 한다.

마치 오늘날의 합창 축제와 같은 형태였으리라. 각 지역의 선소리패들이 각각의 특징을 살린 복색과 율동을 곁들이고, 저마다의 기량을 들어내면서 그곳에 참가한 시민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부르던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도 신바람이 나는 듯하다. 그 중심 종목이 바로 오늘의 <산타령>이었던 것이다.(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