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고종의 전화 봉심(奉審- 능 참배)
《고종실록》 고종 37년(1900년) 3월 14일에 함흥과 영흥의 본궁으로 떠나는 윤용선과 이용직을 소견하다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전략]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전화과 주사(電話課主事)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하여야 할 것이니, 전화로 먼저 아뢰면 필경 빠를 것이다.“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그렇게 하면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는 것은 원래 연한이 있는데 갑오년(1894) 변란 이후로 오랫동안 예를 행하지 못하여 항상 송구스러웠다. 경이 어진(御眞)을 배종(陪從)하는 일로 북도에 내려 가거든 예조(禮曹)의 당상(堂上) 함께 각릉(各陵)에 봉심하고 만약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편의대로 잘 처리하라. 해도의 도신(道臣)과 겸장례(兼掌禮)에게 분부하여 일체 봉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동안 고종과 순종이 문상 또는 봉심을 전화로 했다는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오기는 했으나 기록으로 처음 확인되었다. 능침 봉심에 전화과 주사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한다는 것이다. 봉심이란 왕명을 받들어 찾아본다는 뜻인데 참배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참배는 일본의 신사 참배에서 유래된 말로 가려 써야 할 용어이다 전화 봉심을 시행하는 주체는 궁내부 통신사의 전화과였다는 것도 이 기록으로 밝혀졌다.
▲ 궁내부 교환기를 통해 고종과 대신의 전화통화 모습을 재현한 상상도.(1890년 홍익대 홍석창,이경수 작-/고증-진용옥) |
궁내부 통신사 전화과의 설치년도-1899년
《고종실록》 고종 36년(1899년) 6월 24일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 등을 반포하다.” 기록에 전화과장을 주임관으로 보한다 하였다.
포달(布達) 제47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과 【궁내부 직원 중에 내대신(內大臣) 1인은 두되 칙임관(勅任官)으로 하고 내대신 비서관 1인 혹 2인은 주임관(奏任官)으로 한다.
통신사(通信司)의 전화와 철도를 관장하는 장(長) 1인은 주임관으로 하고 주사(主事) 1인은 판임관(判任官)으로 하는데 모두 궁내관 가운데에서 겸임한다. 전화과장(電話課長) 1인을 주임관으로 하고 기사(技師) 2인을 주임관으로 하며, 주사 8인은 판임관으로 하고 철도과장(鐵道課長) 1인은 주임관으로 하며 기사 1인은 주임관으로 하고 주사 2인은 판임관으로 하는데 모두 궁내관 가운데서 겸임하게 한다.】
제48호, 〈궁내부 관등 봉급표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等俸給表改正件〕〉을 함께 반포하였다. 궁내부는 1894년 이후 설립되었으며 의정부 다음가는 기관이었다 통신사는 오늘날 청와대 경호처와 같은 기관이며 1899년 추가되어 설립되었다는 것도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명성황후 인산 때의 포상기록- 전화기 거행조
“1897년 12월 5일자 인산시의 유공자 포상 중에 농상공부 기수 김철영, 삼화 전보사장 이종영.....전보사주사 이승래 등에게 각각 어린 말 한필을 하사함(電話機 擧行條) 전화가 사용되었다. 명성황후의 인산(국장)일은 1897년 11월 22일이다. 또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의 기록에는 "통신원(通信院)을 설립한 지 겨우 4, 5년이 되었으나 우편(郵便)과 전신 사업(電信事業)이 차례로 확장되었으니 해당 원의 관료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수고한 데 대해 생각해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통신원 총판(通信院總判) 민상호(閔商鎬)를 특별히 훈 1등에 서훈하고, 회판(會辦) 장화식(張華植)을 특별히 훈 3등에 서훈하며, 기수(技手) 김철영(金澈榮)은 특별히 훈 5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을 하사하라."
이로서 궁내주전화 기록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본 군용 전화선(軍用電話線)-1894
《고종실록》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조일 잠정 합동 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이 작성되었다.”는 제목으로 [전략] 내정을 바로잡을 조목 가운데서 경성(京城)과 부산(釜山) 사이, 경성과 인천(仁川) 사이에 철도를 건설하는 문제는 조선 정부 재정이 넉넉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본래 일본 정부 또는 일본국 공사(公司)와 합동할 것을 약속하고 제때에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현재 복잡한 사정으로 처리하기 어렵다. 다만 좋은 방법을 계획하여 될수록 기약한 바를 빨리 성취시켜야 한다.“
경성과 부산 사이, 경성과 인천 사이에 일본 정부에서 이미 설치한 군용 전화선(軍用電話線)은 지금의 형편을 참작하여 조항을 협의하여 정하고 그대로 둘 수 있다고 하였다. 1894년경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군용전화기이지만 경부간, 경인간에 가설되어 있었으며 이를 추인한 것이다 이때 궁내부 전화의 가설이 추진되고 1896년에 이르러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98년 1월 28의 기록에도 궁내부 전화시설이 마련되어 외아문 등 중앙 각 아문과 멀리는 인천까지 개통되고 있었다고 사용기록이 보인다.
백범일지의 사면령 전달기록
“법부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칙제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임직하였던 승지 중의 한분이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 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보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시와 내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감리 이재정[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에 인천 부윤에서 겸임]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우의로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恩命)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후략>“ (백범일지,pp.115-116)
김구(당시는 김창수)는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고 청천강 하류의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츠치다 죠스케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종에게 알려지자 인천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불러 사형집행을 면하게 하였는데 그때가 1896년 윤 8월 26일로 전화가 개통되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 전화는 1896년 윤 8월 23일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통되었다.
최초의 가입전화
▲ 한성전화소와 영등포지소의 현판[대일 반환 문화재] |
《고종실록》 고종 39년(1902년) 3월 19일 기록에 〈한성 인천 간의 전화를 설치하는 일에 관한 안건〔漢城仁川間電話設置件〕〉을 반포하였다. 6월 6일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시내교환업무 개시되어 100회선 자석식 교환대를 설치하였다 최초 가입자 수는 2명이며 다음해에 23명으로 확대되었다. 민상호 유품에는 가입자 명단이 있다 .
뮐렌스테트 자택의 전화기
▲ 뮐렌스테트 자택의 전화[1986 덴마크애서 찍어온 사진이다] |
그러나 덴마크 사람 뮐렌스테트(H.J.Meuhlensteth1855~1915) 1896년 전무학당 전무교사 또는 전무기수의 집에 나오는 사진에 보면 벽괘형 자석식 전화기가 걸려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전화기를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1900년 촬영된 액자 사진이 걸린 것을 볼 때 전화기는 그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궁내부 전화 아니면 통신원 전용전화였을 것이다 1902년도 가입자 명부에 없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전화문상
동칠릉(서울-구리)의 문상전선(電線)의 문제/ 050626
1890년 4월17일 조대비가 승하였다. 익종의 비로서 강화도령 철종의 어머니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에 대항하여 대원군의 집권을 도운 조대비가 승하하자 동칠릉(지금의 동구릉)의 익종 묘역 수릉 옆에 안장하게 되었다. 다음해 1월에 이르러 고종이 조석 문후를 드리기 위하여 전선(電線) 가설을 화전국(재한 청국 전신기관)에 요청하게 되었다.
화전국은 동칠릉 이외의 지역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 되며, 대비의 대상 후에는 반듯이 철거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대상 이후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후속 기록이 없다.(이상 100년사 기록, (統記) 권27 신묘년(辛卯年) 1월 10일조. 전안(電案) 권7 광서(光緖) 17년 1월 13일조, 1월 14일조 )
문상 전선의 가설승인을 청국측 화전국에 요청하였는데 1895년에 서로전선( 인천-서울-의주-봉황성)을 부설하고 우리나라가 청국으로 부터 10만 냥의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대리운영을 위임한 전신기관이여, 처음에는 광화문 전화국자리에 작리에 있었으나 2년 뒤 중앙 우체국 자리로 옮겼다.
1888년에는 조선전보총국이 설립되어 남로전선( 서울-전주-부산)을 독자적으로 개설하고 화전국과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청국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가설 전선이 전화인지 전신인지가 불명확하다. 당시에는 전기선, 전신선, 전화선 모두를 전선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1885년 6월 조선 청나라 사이 의주 전신합동(조약)이 체결 되고 서로전선이 가설 운영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조의 전신선이 개설되었다. 9월 28일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10만 냥으로 5년 거치 20년간 무이자 상환조건으로 청국에서 제공하였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는데 아마도 일본을 견제하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차관공여에는 몇 가지 조건을 붙이고 있다. 제3조에 보면 개통일로부터 향후 25년간은 타국이나 타국 상사에 전선개설을 허락하지 않으며 신, 증설의 경우에도 화전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평등 조약이기 보다는 당시나 지금이나 배타적 권한을 보유한다는 일반적 조건이었다. 1888년에 개설한 남로 전선도 중국 측과 합의하여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부설하였으며 동칠능 선의 전선가설도 의주합동전선 제3조의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100년사 78-79쪽 의주 전선합동 내용 참조)
<한국에서의 전신 부설의 이권을 노린 청국은 조대비(趙大妃)가 묻힌 동구릉과 왕실 사이에 전신선을 놓아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문상(問喪)하러 행차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전선으로 문상을 하면 훨씬 편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말에 고종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삼년상이 지나면 철거한다는 조건으로 문상선(問喪線)이 가설되었다. 이때부터 전화 문상의 전통이 왕실에 생겨난 것이다.> 이상은 이규태의 개화백경 3집에서 게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청국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이야기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 우리나라에 처음 놓은 전화, 임금에게서 전화가 오면 절을 하고 받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순종의 전화문상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덕수궁에 은거하게 되었을 때 창덕궁에서 기거하고 있던 순종은 직통 어용전화선을 가설하고 태상황(太上皇)인 고종에게 하루 세 때의 수라(水刺) 시간과 어침(御寢) 시간에는 반드시 문안전화를 걸었다 한다.
그리고 고종 서거 뒤 순종의 동태를 보도한 신문기사에 의하면 덕수궁에 차린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 직통 전화소를 따로 두어 수시로 전화문안을 드렸는데 이 때 황제는 상복으로 정장한 다음 내시가 혼전의 참봉에게 덕율풍의 화구(話口)를 혼백(魂魄)에 대도록 명을 내리면, 엎드려 절을 하고 또 내시는 재빨리 엎드린 황제의 입 가까이에 전화기의 화구를 갖다 대었다 한다. 그러면 황제는 곡으로 선왕의 혼백에 고하였는데 이 문상용 전화는 그 구조가 특수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다.
당시 중신 가운데는 혼백에 낯선 요물로 문상을 드린다는 것이 왕도에 외람된 일이라 하여 간언하기도 했다지만 구습과 야합하여 정착하려는 과정의 한 단면으로서 전화 문상의 재미스러운 의의가 깃들어 있다 하겠다.
맺음
오늘날 한국은 휴대 전화기가 5,000만 대이며 그 중에서 슬기전화(스마트폰)는 반 이상을 훨씬 넘는다. 정보강국 전파대국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 메김하고 있다. 그런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전설 같은 전화 문상과 4번 절하고 전화를 받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스펨에다 괴문서가 난무하고 헛개공간(사이버) 테러가 횡횡하는 전화 공포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어찌 과거를 본받지 못하는가?
더더욱 한심한 일은 이런 역사가 서린 곳에 어설픈 문화권력[?l이 서약음악당을 짓고 역사를 뭉개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