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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영월 단종의 장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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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을 향해 걷는 왕릉 탐방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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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의 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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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위쪽에서 장릉을 내려다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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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으로 격을 갖추기 위하여 곡장을 두르고 왕릉 수호를 위하여 석호와 석양을 배치하였으나. 다른 릉에 비하여 석호와 석양의 수가 절반인 각각 2마리씩만 배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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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앞에 있는 문인석. 장릉에는 무인석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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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의 장명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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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본 정자각장판옥 배식단 비각 수복실. 영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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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다 죽은 충신들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배식단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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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던 충신, 조사위, 환자노군, 여인 등 268위의 영령을 모신 장판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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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도와 그 앞에 설치된 홍살문, 홍살문 앞 신도가 꺾이는 곳에는 영천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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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를 행할때 사용하는 정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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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때 물을 길어 쓰는 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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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종제 때 썼던 줄다리기 용 칡덩쿨 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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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과 홍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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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도의 행적을 새긴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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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촌비각과 출입문. 중종 11년 노산군(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유실된 묘를 찾아 헤메었으나 오랫동안 찾지 못하다가 중종 36년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꿈속의 현몽으로 찾게 되었다고 하며, 그 행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비각은 1973년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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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으로 시호를 받은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비석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초기 세종에 이어 그의 큰아들인 문종이 5대왕으로 등극하였으나, 문종은 안타깝게도 신체가 허약하여 임금 노릇도 얼마 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문종의 아들인 노산군(후에 단종)에게 제6대 왕위를 물려주면서 세종과 문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어린 아들의 왕위를 잘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하고 세상을 떴다.
그러나, 왕위에 욕심이 컷던 수양대군(문종의 아우)에게는 그런 부탁이 통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자신을 따르던 또 다른 신하들을 이끌고 세종과 문종의 충신들을 하나 둘 처단하고 단종으로 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임금이 되는 것처럼 양위를 받아 왕위에 등극하였고, 단종은 왕위를 물려준 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첩첩산중 영월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생과 선비들은 조카를 내쫓고 임금이 된 수양대군의 반란을 도저히 따를 수 없다며 속세를 등지거나(김시습), 수양을 내쫓기 위하여 거사를 계획하는(금성대군) 등 저항이 있었다. 그런 저항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밀고로 발각되어 수많은 선비 유생들이 죽어갔고, 단종 또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지 못하고 귀양지인 영월땅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다.
역적으로 죽게된 단종의 시신은 아무도 감히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몰래 묻어준 사람이 있었으니, 후에 가서야 그가 엄홍도였음이 알려졌다. 엄홍도는 사약을 받고 죽은 뒤 강물 속에 버려졌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선산에 묻어주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엄홍도의 행적이 알려지자, 엄홍도의 행적이야말로 인륜을 가장 중요시하는 유교의 의리요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리를 잘 한 일이라 칭송하며 기록하고, 단종의 능 옆에 그의 정려각을 세우고 기리게 되었다. 그런데 단종의 릉은 다시 멸실되어 그 위치를 알지 못하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른 뒤 연산군을 내쫓고 임금이 된 중종은 단종의 릉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다(종종 11년 1516년). 그러나 울창하기 그지 없었던 당시 멀고 먼 영월땅 어디에 단종의 묘가 있는줄 알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중종 36년(1541년) 이곳에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단종의 현몽에 따라 묘를 다시 찾게 되었다고 하며, 그런 박충원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단종의 능 앞 한쪽에 행적을 세긴 비를 세겨세우고 비각도 세웠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단종의 릉인 영월 장릉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지만, 철모르는 아이로 12살에 왕위에 올라 작은 아버지의 등살에 임금노릇도 못하고 가시방석에 앉았다가 쫓겨나 귀양가서 17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영혼을 달래고자 영월에서는 대대적으로 단종제를 행한다.
단종제는 매년 4월 마지막에 열린다. 올해는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거행된다고 한다. 이제는 제사와 더불어 축제처럼 행사를 한다지만, 서글픈 역사속에 권력이 뭐길레 조카를 죽이고 또 충신들을 죽여야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권력은 형제는 물론 아버지와 아들도 다툰다고 하지만...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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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