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7 (목)

  • 구름많음동두천 19.3℃
  • 구름많음강릉 16.6℃
  • 구름조금서울 19.8℃
  • 흐림대전 22.1℃
  • 구름조금대구 18.5℃
  • 구름많음울산 19.3℃
  • 구름많음광주 19.3℃
  • 박무부산 17.5℃
  • 구름조금고창 17.3℃
  • 구름많음제주 19.4℃
  • 구름많음강화 15.5℃
  • 흐림보은 22.6℃
  • 구름많음금산 21.8℃
  • 구름많음강진군 18.0℃
  • 구름조금경주시 18.6℃
  • 흐림거제 17.2℃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제주 한경면 김대건신부 표착기념관

   
▲ 김대건신부 제주표착을 기념하여 세운 성당과 기념관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있다.

 

   
▲ 김대건신부가 타고오다 제주에 표착했던 라파엘호의 재현모습으로 기념관 오른쪽에 있다.

 

   
▲ 제주표착기념관 외벽에 있는 간판

 

   
▲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 김대건신부의 행적을 표시한 지도

 

   
▲ 서해안 인천(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제주로 표착하였다가 군산으로.

 

   
▲ 풍랑에 휩싸인 라파엘호의 재현

 

   
▲ 제주 한경면 기념관 앞 바닷가에 표착한 모습의 재현

 

   
▲ 라파엘호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

 

   
▲ 김대건신부가 모시고 다니던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상"의 모습으로 기념관 오른쪽에 있다.

 

   
▲ 기념관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닷가. 바다 가운데에는 차귀도가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 성기자] 조선이 당쟁의 시대를 넘어 세도정치로 흐르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게 되었으나, 지배층은 자신들만의 권력과 부를 누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되자 백성들은 이런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 어디에 마음이라도 믿고 의지할 곳을 찾던 중 청나라에 들어온 천주교를 알게되었다. 천주교(하늘이 주인인 교)를 믿으면 세상에서의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수 있고, 그리고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 태어난다는 믿음이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던 민중들에게는 그 어느 가르침 보다도 삶에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어온 서학(천주교)은 유교의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던 조선조 유생과 선비들에게는 혹세무민한 가르침이었다. 서학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니 이들은 유교에서 가장 숭배하는 조상에 대한 예의를 전혀 무시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도 다를바 없이 귀하게 여기던 조상들의 사당에 모신 신위를 우상이라고 배척하였다. 이런 행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혹세무민하는 이교도들을 발본색원한다며 서학(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갖은 고문을 가하였고, 결국 참수형을 가하였다.

이렇게 죽은 천주교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현세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면 죽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천국에 다시 태어나고 영원한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천주교의 성직자로 조선에서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신부는 그 증조할아버지 때 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밀리에 천주교를 믿으면서 살았다. 본래 충청도 당진 우강면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경기도 용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대건의 어린시절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로 비밀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던 김대건은 체계적으로 천주교를 배우기 위하여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교리를 공부하였다.

 청나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상하이에서 25세에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돌아와 비밀리에 전도를 하다가 1년 후인 26세때 백령도에서 붙잡혀서 결국 용산 세남터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이렇게 짧은 생을 살고 갔지만, 그가 뿌린 신앙의 씨앗이 자라나 오늘날 천주교의 뿌리가 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 그가 인천에서 출발하여 험한 뱃길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오는 도중 험한 풍랑을 만나 육지로 곧바로 도착하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제주 한경면 이곳 바닷가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사실을 기념하여 이곳에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세우고 그가 험한 파도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했던 성모상을 재현하여 세웠다.

김대건표착기념관 내부에는 근세 천주교의 전파와 탄압의 역사적 기록과 박해에 사용했다는 각종 고문기구들도 있어, 섬짓하기도 하였다.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조선을 지배하던 지배층은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고, 무조건 박해로 뿌리를 뽑겠다며 천주교인으로 잡혀온 사람들을 수만명씩 죽였던 아픈 역사적 사실도 돌아보았다.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그런 믿음과 약속이 있어야 백성은 국가에 각종 세금과 병역의 의무 또는 노역을 아무런 불평없이  받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로부터 편안한 삶을 살수 있게 하지도 않고 오로지 괴롭히고 쥐어짜서 지배층 자신들만의 부귀영화에 망하는 날까지 몰두했던 조선시대의 비극을 되돌아 보면서 구 한말 백성들의 삶을 되돌아 본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