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서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장준하 선생
선생님께서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시기 4년 전에 직접 쓰신 《돌베개》에 부친 글귀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광복 조국의 하늘 밑은 적반하장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민족의 정기를 훼손한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는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특권계층이 되어 지난 수세기 동안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조국을 위해 피를 뿜고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굴곡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지 벌써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죽음의 원인과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선생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하지만 진실을 누군가가 자꾸 감추려고 해도 당신이 걸어온 길마저 감출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두웠던 한국현대사의 굴곡을 온 몸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하신 이 나라의 스승이자 영웅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일본군에 쫓기고 6천리를 걸으며 배고픔과 추위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잘 곳이 없어 광막한 중원 대륙과 동사(凍死)의 기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나라 없는 설움과 한스러움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또한 서안에서 미 OSS 대원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되기 직전에 아내에게 유언을 쓰고 김준엽 대원의 부인에게 유서 봉투를 부탁하며 애써 눈물을 삼키고 참아야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광복 후에 사상계를 창간하여 부정부패로 점철된 이승만의 독재 정치와 5.16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여러 차례 연행과 구속을 당하셨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국회해산까지 강행한 초유의 유신헌법을 저지하기 위해 묵묵히 투쟁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께서는 세상의 모진 고통을 받아가며 힘겹게 사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외세와 반독재에 맞서며 걸어온 길은 늘 올곧았습니다. 비록 39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몇 년 전 사법부 재심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선생님께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뒤늦게나마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한 재판부의 판결이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고인은 격변과 혼돈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에서 조국광복과 반독재민주화투쟁, 사상계몽운동 등을 통해 나라의 근본과 민주적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일생을 헌신하셨던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이자 스승으로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분이고, 재판부도 그와 같은 역사인식에 이견이 없다.
국민주권, 주권재민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근대 헌법의 기본적인 헌법가치가 무참히 핍박받던 인권의 암흑기에 고인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회복하고 어둠을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스스로 개인적인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고인의 숭고한 역사관과 희생정신은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 시대를 같이 호흡하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큰 울림과 가르침으로 남아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는 바, 고인께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선생님께서 걸어온 길은 이 시대를 같이 호흡하는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과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진실과 정의의 길은 고독하며 끝없는 자기희생을 요구할 만큼 많은 고통이 뒤따르지만 그 어떤 길보다 역사 앞에서 당당하고 뿌듯한 길이라는 것을...
저는 선생님께서 살아온 그 길을 뒤따라가고자 합니다. 당신께서 한 평생을 염원하며 꿈꿨던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는 어렵게 이루어냈지만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은 너무나도 멀기만 합니다. 그 멀고도 먼 길의 종착점은 아마 친일파를 청산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와 존경을 받는 나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달성되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통일 대한민국, 그리고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는 조국이 될 것입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세상에서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세상으로 돌려놓겠습니다. 권력과 부가 특정 계층에게 집중되지 않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현되는 민주 국가를 이룩하고 더 나아가 통일 대한민국을 만드는 시대의 당면 과제를 반드시 이루어낼 것임을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선생님께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진정으로 조국의 앞날과 미래를 늘 걱정하며 평생을 한결 같이 살아오신 장준하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존경하며 뒤따르는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있기에 저는 오늘도 희망을 바라봅니다. 저는 얼마 전 여러 청년들과 함께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일군에서 탈출하여 6천리를 걸으며 충칭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청사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안으로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그 감격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임시정부 청사를 바라보고 독립군가를 제창하며 마주했던 그 가슴 북받치는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느꼈던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가겠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던 선생님께서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눈물로 맺은 다짐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독재정권과 불의에 항거하며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장준하 선생님.
부디 편히 영면하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