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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100년 편지 248] 김찬(金燦) 선생님께 -원희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찬 선생님, 저는 아들만 둘 뒀습니다. 저는 아들이 16살이 되면 같이 서점에 가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선물했습니다.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김산)이 중국어 사전 하나 끼고 광활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그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리랑>이라는 책은 저에게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리랑>을 왜 미국의 한 아주머니가 썼어야 했는가에 의문 아닌 분노를 가졌습니다. 제가 님 웨일즈를 아주머니라는 표현을 했다고 어떤 교수님이 화를 내시더군요. 실제 님 웨일즈는 <아리랑> 말고, 습작 수준의 소설 정도를 남긴 무명 작가였을 뿐입니다.


제가 분노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구보 염상섭을 비롯한 많은 소설가와 작가들이 있었지만(물론 심훈의 상록수도 있지만) <아리랑>과 같이 감동적인 글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선배의 역정적 삶의 기록을 외국인의 손에 맡겨야 했느냐는 안타까움입니다. 제가 기회가 되면 외국인이 쓴 <아리랑>보다 감동적인 일대기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11년 전 저에게 그 기회가 왔습니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님과 같이 중국을 갔을 때입니다. 저는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특집 취재차 중국에 가 조선족 출신의 중국공산당교 최용수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때 최 교수가 바로 선생을 소개하면서 중국에서는 <아리랑>의 장지락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선생의 아들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똑똑한 선생의 아들은 아버지 기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조선에서 활동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와 김찬 선생의 행적을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의 조선에서 행적은 대단했습니다. 선생은 조봉암, 김형선, 김명시 등 당시 유명 독립운동가와 나란히 신문에 사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항일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선생의 행적을 처음으로 신문에 기사화 했습니다.(경향신문 2006616일자) 1911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한 선생은 1922년 가족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했습니다. 선생은 학창시절 공산청년단 가입하고, 1929년에는 상해에서 김단야, 김형선, 김명시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선생은 1931년 고향 진남포에 돌아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선생이 배후 조정한 진남포 삼성 정미소 여공 파업은 일제하 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생은 대담하게 51일 노동절에 비라와 책자를 살포했습니다. 결국 1933년 선생은 김단야의 처 고명시, 김형선, 김명시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강했습니다. 선생은 무려 45일 동안 일제 경찰의 고문을 견디며 자신의 신분을 숨겼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이렇게 오래 견딘 사람은 전무후무합니다. 선생의 인내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일제 경찰이 그 사실을 수기로 남겼을까요. 필자가 선생의 45일 고문기록을 찾았을 때 베이징에 있는 최용수 교수는 매우 좋아했지요. 마침 서울에 온 최 교수는 필자와 김자동 회장님과 인사동에서 오랜 얘기를 나눴습니다.


 

선생은 신의주형무소의 혹독한 수감생활을 끝내고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934년 평소 알고 지내던 북경대학교 이과계열(지리학과) 최초의 여학생 도개손과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평범한 조선인 선생이 좋은 집안에 능력도 출중한 중국 여성과 결혼한 것에 시기하는 중국인 남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선생 부부는 중국에서 나란히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상하이-하얼빈-베이징 등 중국대륙에서 펼친 선생 부부의 항일투쟁 기록은 중국 정부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의 조선과 중국에서 벌인 항일투쟁은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선생 부부는 1937년 꿈에 그리던 혁명의 성지 옌안에 도착했습니다. 선생은 섬북공학 제1, 부인 도개손은 중앙당교에서 나란히 혁명의 중추로 공부했지요. 옌안에서 이렇게 고위과정에서 공부한 사람은 중국 공산혁명 지도자들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선생 부부의 역량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생도 옌안의 음모가캉셍의 제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김단야와 장지락과 같이 일제 특무라는 혐의였지만, 선생은 조선인 주제에 출중한 중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질투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부인 도개손은 조선인 남편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스스로 남편과 생을 마감했지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중국 공산당은 선생 부부 처형사실을 숨기기 위해 관련서류를 폐기하고 처형명부에서 이름을 지웠습니다. 옌안에서 죽은 많은 사람 중 먹으로 이름을 지운 사람은 단 두 사람, 선생과 선생의 부인이었습니다. 캉셍이 선생 부부의 이름을 지웠다는 것은 그 악독한 인물도 뒷날 잘못된 결정임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선생 부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죽어서도 당신은 억울했습니다. 당신은 김락준이라는 동명이인 때문에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당신보다 16살 많은 김락준이 당신 이름 김찬을 별명으로 썼던 것입니다. 김락준은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해 중앙위원까지 했지만 나중에 변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일제 경찰도 두 사람은 동명이인이라고 분명히 명시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최근까지 독립운동사를 전공했다는 국내 교수조차, 두 사람을 혼동하고,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우기기까지 하더군요. 무지한 후배들이, 아니 게으른 후학들이 당신의 존재를 모르거나 무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신의 대단한 항일투쟁 사실도 묻혀 버렸습니다. 대신 용서를 빕니다.

 

뒤늦게 두 사람이 동명이인임을 확인한 중국 정부는 19825월 선생의 부부를 복권시키고 보상까지 했습니다. 선생과 부인의 추모식도 성대히 거행됐습니다. 최용수 교수는 중국에서 항일투쟁 기록도 거의 없고 혼자 처형된 <아리랑>의 장지락보다, 중국에서 항일투쟁 기록도 많고, 부부가 같이 처형된 김찬도개손 부부가 훨씬 감동적이라는 평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조선에서 항일투쟁 기록이 거의 없는 장지락보다 김찬은 훨씬 높게 평가 받아야 합니다.

 

지난해 광복절을 즈음해 당신 부부의 평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이 발행됐습니다. 보기 드문 부부 평전입니다. 진작 당신 부부의 삶을 정리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당신 부부의 평전은 곧 중국어판으로도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 김찬과 부인 도개손도 편히 쉴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