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 일제 침략 없었다면 /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 갓 태어난 핏덩이 / 남겨두고 뛰어든 /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 유치장 밖서 / 숨져간 어린 딸
하늘이여 /어린 영혼 가는 길 / 무궁화 꽃 뿌려주소서.
박 지사님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저는 이러한 노래를 읊었습니다. 어린 핏덩이가 유치장 밖에서 울어댈 때 지사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경이 악랄하다고는 해도 갓 태어나 한 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둔 어머니를 잡아다 유치장서 고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옷을 모두 벗기고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면서 실신하도록 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어린 핏덩이를 안고 면회소에서 삼일동안 애걸복걸하던 그 친척이 싸늘히 죽어간 주검을 보듬어 돌아가던 그 발걸음은 고스란히 우리 겨레가 겪은 아픔이요, 눈물이요,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이때의 내용이 1922년 동아일보에 ‘산모를 나체로 심문, 어미가 정신없이 매 맞는 중에 아기는 경찰서 문 앞에서 죽어’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되었을까요?
박 지사님!
일제가 지사님께 내린 징역 2년의 죄명은 ‘불온단체인 대한독립부인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한 죄’더군요. 그 보다 앞서 부군이신 곽치문 선생은 5년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힌 상태였으니 그 보다 더한 괴로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구속되어 감옥신세이니 집안의 고통이야 말글로는 다 표현키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지사님 부부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열세 살에서 일곱 살에 이르는 4형제가 고아아닌 고아로 지내다가 지사님이 옥중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둘째와 셋째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큰 슬픔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지사님은 만기 출소하시어 남은 두 딸과 재회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군께서는 감옥에 남아계셨고 고문 후유증으로 가출옥상태에서 숨을 거두셨으니 이 또한 천지간 슬픔이요, 격랑의 파도 속에 내 몰린 신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도 지사님은 남은 두 딸을 부여잡고 꿋꿋이 사셨습니다. 세상의 슬픔을 모두 거머쥐고도 지사님은 좌절치 않고 일어나 다른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뛰셨습니다.
박치은 지사님!
저는 지사님과 같이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20분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해서 글을 썼지만 특히 지사님의 삶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것은 옥중에서 금쪽같은 세 자녀를 잃어야 했던 사실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삶이 하나같이 기구한 삶이었지만 옥중에서 세 자녀를 잃은 분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더욱 가슴이 찡함을 느낍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박 지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가정과 목숨을 잃었지만 우리가 그러한 사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사님과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을 쉬지 않고 하고 있으니 언젠가 우리 국민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돌아볼 날이 올 것입니다. 지사님! 하늘나라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녀들과 만나셨는지요? 그곳에서 평안하심을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