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년(효종6) 종사관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綠)》에 따르면, 대마도에서부터 “서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찾아와서 서화인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정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일본에서 조선 그림에 대한 인기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 그림이 일본에 전해지는 한편, 이 시기 일본의 그림 또한 국내에 들어오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기사에는 조선 초부터 일본 사신들이 도래할 때마다 금박병풍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조선통신사가 막부의 장군을 만나 국서(國書)와 예물을 전하면, 막부 역시 이에 답하는 국서와 답례품을 전달하게 됩니다.
막부가 답례로 보낸 물품 중에는 금박을 입힌 병풍그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이 선물한 병풍은 1차 조선통신사 파견을 제외하고 2,3차 파견 때는 10쌍, 그 이후로는 20쌍씩 조선 임금에게 증정하여 총 200여 쌍 이상의 병풍이 국내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답례 병풍들은 일본 궁정화가 집단인 가노파(狩野派) 화가들 중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제작한 것으로 보여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64년 11차 조선통신사행 수행원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의 《승사록(乘槎錄)》에는 20쌍의 병풍을 받은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정황을 알려줍니다.
“금병풍과 금안장 등의 물건은 법식대로였으며, 금병풍은 푸른 비단 보자기로 싸서 붉은 칠을 한 함에 담아두었으며, 금안장 또한 함에 담아두었다. 금병풍은 함 스무 개에 각각 한 쌍씩을 담았는데 모두 저들 풍속의 유희(遊戲)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사상께서 거기에 더럽고 욕보이는 모습이 있을까 걱정을 하시어 앞에 펼쳐 놓고 한쪽씩 살피고 살피는 것을 끝낸 후에 파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는 창덕궁에서 전해진 에도시대 일본병풍 4점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 <부용안도> 병풍 1쌍, <모란도> 병풍 1점이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부용안도> 병풍 1쌍(2점)은 1748년 10차 조선통신사 파견 때 영조 임금이 일본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입니다. 이 금박병풍은 가노파의 대표적 화가인 가노 유호(狩野祐甫, かのうゆうほ, ?-1762)의 작품입니다. 금박을 전체적으로 입힌 바탕에 부용이라는 꽃과 기러기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안개와 구름 사이에는 장식적인 요소들이 돋보입니다.
독특한 부분은 병풍 각 오른쪽 1폭의 상단에 영조가 적은 어제어필(御製御筆)이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어필의 내용에 따르면, 선물로 받았던 병풍을 신미년(辛未年, 1751)에 원손전(元孫殿) 안에서 펼쳐 함께 병풍을 감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미년은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왕세손에 책봉된 해이기도 한데, 정황상 영조가 받았던 병풍을 의소세손의 방안에서 펼쳐 어필을 적은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 측에서 선물한 목록 가운데 금박의 병풍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조선 초부터 보인 일본 회화의 선호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기사 중에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시비가 있기도 했으나, 세조는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예물로 바친 병풍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면서 앞으로도 선사하여 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연산군은 국가에서 왜국병풍을 그리도록 지시하기도 하였고, 인조 연간에는 일본 병풍이 궁중에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금박병풍이 200여 쌍 이상 만들어져 국내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있는 회화는 매우 드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조어필이 적힌 <부용안도> 병풍 1쌍이 현존하여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가노 유호의 작품이 매우 드물게 전하기 때문에 이 병풍이 양국 모두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김아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