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의정부에 있는 ‘신숙주 선생묘’에 가면 1971년에 한글학회에서 세운 ‘문충공고령신숙주선생한글창제사적비’가 있다. 보한재 선생이 나신 554돌을 맞이하여 당시 한글학회 허웅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앞장서서 세운 사적비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요 관리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 《운회 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그의 이름만이 빠짐없이 올라간 것만 보아도 그 업적을 가늠해 볼 수 있다(표1 참조).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한글창제사적비는 한글학회가 아니라 한글을 쓰는 남북한 온 겨레가 세워야 할 사적비였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고 있다. 사육신, 생육신의 삶은 고결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세조 편에 선 것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볼 수 없는 정치적 맥락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살아남아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고 고귀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신숙주 평가는 매우 정확하고 균형을 잡고 있어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숙주는 분명히 우리 역사에 큰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갔을 뿐,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또 그는 비난받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그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그가 뛰어난 학자요, 세종ㆍ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기에 따르는 유명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역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_ <이이화, 신숙주-무엇이 충절이고 무엇이 변절인가>(인물한국사/다음 백과사전)
그가 변절해서 그의 부인 무송 윤씨가 죽으려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단종 복위를 위한 사육신 사건은 1456년(세조 2년) 6월이었는데 그의 부인은 5개월쯤 전인 1456년 1월에 죽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같은 연도에 두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이화 선생의 말처럼 “그의 변절을 미워하는 자들이 날조한 것(100.daum.net/encyclopedia)” 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에 나온 여러 문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내내 입에 오르내렸던 듯하다. 이런 이야기를 박종화는 《목매는 여인》에서 이광수는 《단종애사》에서 받아씀으로써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 모든 왜곡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바꿔 부르는 데까지 이른듯하다. 이는 그의 직계손이 아니더라도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니다.
올해는 신숙주 나신 지 600돌이 되는 해인지라 그의 업적과 우리 후손들의 태도를 차분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가로이 공부에만 열중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호(보한재)대로 그는 학자로서 관리로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일하다 59세 나이로 운명했다. 신숙주는 스물두 살 때인 1438년(세종 20)에는 과거시험에 붙어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훈민정음 창제 전인 스물다섯 살 때인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고 창제하던 해 27살 때인 1443년에는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변효문 선생의 서장관에 뽑혀 일본에 갔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산과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명나라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신도비문 등에 무려 13번을 다녀왔다고까지 기록해 놓았다. 실제 그 먼 곳을 13번이나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그의 젊음을 다 바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때의 고달픈 여정 속에서 성삼문과 주고받은 시가 《보한재집》에 남아 있어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세종실록은 신숙주와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간 사건을 간단하게만 기록해 놓았는데 《성종실록》에는 이창신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남겨 놓았다. 성종 때인 1487년에는 이창신이 “세종조에 신숙주ㆍ성삼문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묻게 하여 《홍무정운》과 《사성통고》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자 훈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실록 1487.2.2.).
신숙주는 1447(세종 29)년 31살 때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고 《동국정운》⋅《사성통고》 편찬의 핵심 역할을 했다. 1445년 2월 집현전 원로학자들이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운서를 아시오.”라고 호통을 쳤다. 중국 한자와 한자음 사전인 운서에 대한 연구는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었고 운서에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책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숙주의 최고 한글 업적은 1449년 펴낸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 대표집필이다.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신숙주는 “이제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하나의 소리라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정음이 음을 전하는 중심 줄이 되었다.(自正音作而萬古一聲, 毫釐不差, 實傳音之樞紐也)” 라고 하면서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吁! 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後之觀者, 其必有所得矣)”라고 감동을 적고 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이란 책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중국 황제와 지식인들이 중국 한자음을 적기 위한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 운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천 년 넘게 적지 못한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된 기쁨을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우리 동방에서 천백 여년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東方千百載所未知者. 可不浹旬而學. 苟能沉潛反復. 有得乎是. 則聲韻之學. 豈難精哉.)”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신숙주는 36살 때인 1452(문종 2)년에는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 대표로 갈 때 서장관으로 함께 가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37살 때인 1453(단종 1)년에는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출장 중이었으나 신숙주를 측근으로 끌어들이고자 공신록에 올렸고 곧이어 도승지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로 변절자의 굴레를 씌웠으나 진정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 그런 평가는 옳지 않다. 44살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강원ㆍ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여 국방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55살 때인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의 명으로 세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 《해동제국기》를 지어 조선 시대 내내 지침서가 되는 일본과의 외교 지혜를 남겼다.
56살 때인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가 총괄하였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ㆍ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고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번역 관련 책을 펴냈으며, 또 일본ㆍ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언어생활뿐 아니라 국방, 외교 등 중요 분야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매우 넓다. 2017년 10월 27일에 한글학회와 고령신씨대종회에서 신숙주 선생의 탄신 600돌을 맞이하여 한글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를 열기로 해 특별히 그 의미를 적어 보았다.
* 이 글은 “김슬옹(2017). 보한재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 의미. ≪한글새소식≫ 541호. 한글학회. 12-13쪽.”을 두 배 정도 늘려 보완 것임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