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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를 살았던 보각국사 승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각국사는 고려 말 원나라 간섭이 한창이던 충숙왕7년(1320)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충혜왕 복위2년(1341) 승과고시 선종선에 급제하였다. 이때는 몽골의 간섭기로 고려인 모두가 몽골황실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던 시기로, 원나라 황실에 뒷줄을 댄 '부원배'들이 실권을 쥐고 고려의 왕실을 흔들던 때이기도 하다.

 

고려의 서울 개경(개성)에는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에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왕실을 일일이 간섭하였고, 고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원나라에 보고하고 국정에도 깊이 간섭하였다. 그런데 보각국사가 태어난 때 임금인 충숙왕과 그 뒤에 임금이 된 충혜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지만, 원나라의 국정간섭으로 고려 임금을 두 번에 걸쳐 교대로 하였다. 당시 요동지역 선양에는 심양왕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려의 전쟁포로 , 항복한 외국인 떠돌이 유민 등의 집단이 많았는데, 이들을 다스리던 임금으로 충선왕은 고려왕을 그만둔 뒤 심양왕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황실 및 귀족들과 교우하기도 하였다.

 

충숙왕때에는 왕고(충선왕의 조카)가 심양왕이었는데, 충숙왕은 고려의 임금이 된 뒤로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소홀하였여, 이 기회를 틈타 당시 심양왕인 '왕고'가 고려의 왕위를 찬탈하려 원 황실에 충숙왕을 무고하는 바람에 연경으로 불려가 5년(1321년~1325) 동안 근신하며 체류하기도 하였다. 1325년 근신에서 풀려 돌아온 뒤에도 부원배들의 무고를 받고 더욱 정사에 염증을 느껴 1330년 아들인 태자 정(충혜왕)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원나라로 들어가 살았는데, 왕이된 충혜왕은 행실이 너무도 황음무도하여 원 황실은 충혜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고려 임금으로 임명하였다.(1332년) 그리하여 충숙왕은 두 번째 고려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취임한 뒤로도 여전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놀고 사냥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런 충숙왕이 1339년 병으로 죽게되자 그 뒤를 원나라에 끌려가 근신의 처분을 받았던 아들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두 번째 임금이 되었다. 충혜왕은 두 번째 고려 임금이 된 뒤로 또 다시 황음무도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여인(비 빈), 외삼촌의 아내 등을 능욕하였고 그 사실이 결국 원나라에 알려져 체포되고 압송된 뒤 원나라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귀양형을 받고 수레에 태워 게양현(광동성)으로 가던 중 노상에서 죽고 말았다. 이런 혼란시대를 살았던 고려백성들이 참으로 가엽기 그지 없다.

 

이런 임금들이 고려를 다스리고 있었기에 고려는 그야말로 역사성이나 주체성을 상실한 채 원나라의 눈치나 보면서 임금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잇권이나 챙기고, 사냥과 오락 그리고 여자들과 놀아나는 일에 빠져있었다.

 

그런 나라의 앞날에는 아무런 희망도 있을 수 없었다. 황음무도한 충혜왕의 뒤를 충목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는 8살에 즉위하여 12살에 죽었으며, 또 그 뒤를 충정왕은 12살에 즉위하여 15살에 죽고 말았다. 살았어도 임금노릇 하기 어려울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임금이 공민왕이었다.

 

공민왕은 1330년 태어나 1351년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충혜왕의 친동생이다. 그는 불과 21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어린시절 몽골의 초원에서 살았고, 원나라의 내정을 꿰뚫고 있을 뿐 아니라, 대륙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몽골의 멸망이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고려의 임금이 된 뒤, 고려 충신들의 건의를 과감히 받아들여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를 가로막던 가장 큰 세력은 원나라의 권문세가들과 부원배들이었다. 그중 부원배의 중심에는 원나라에서 황후가된 '기황후'의 오라버니 '기철'을 중심으로한 귀족들이었다.

 

이런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보각국사는 불교공부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당시 큰 절의 주지를 사양하고 작은 암자에 머물며 당대 최고의 선사인 나옹화상과 불교의 진리를 논하였고, 공민왕10년(1361)에는 임금의 요청으로 궁궐에 머물며 국정의 중심을 잡아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봉황산으로 숨어버렸다.

 

그 뒤 공민왕의 요청을 받고 궁궐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기도 하였다. 격동의 시기를 사는 동안 공민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우왕시절에는 우왕의 요청으로 광암사에 3년 동안 머물다 다시 도망하여 작은 암자 연화암에 머물며 불경의 간행에 힘을 기울였다.

 

보각국사는 우왕3년(1383) 국사에 봉해진 뒤 개천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공양왕(1392) 4년에 이성계에게 개국축하의 표문을 올리고 충주 청룡사에 들어와 입적하였다. 그는 세속의 권력에 응하지 않고 오로지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스님으로 살았으며, 생전에는 당대 유학자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과도 깊이 교류하였다.

 

그의 저서는 4편이 전하고 있는데, 《선림보훈(禪林寶訓》) 2권 2책은 보물 제700호,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小論讚要朝見錄)》은 보물제720호, 호법론(護法論)은 보물 제702호,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보물 제641호로 지정되었다. 모두가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나, 인간자체와 우주의 진리에 대한 성찰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마지막 시기 고승으로 추앙받던 그에게 최고의 예를 다하여 승탑을 짓게 하고, 그 탑의 이름을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이라 붙여주었다. 조선 태조3년(1394) 탑이 완성되었는데, 그의 비는 이성계의 최측근인 권근이 지었다. 보각국사의 승탑은 현재 국보 제197호로 탑비는 보물 제658호로 지정되었다. 그 위치는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터 안쪽에 있다. 그가 머물던 청룡사터는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모두 전란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며, 최근 발굴조사하여 돌기단과 주춧돌들만 발굴확인되었다.

 

보각국사가 살았던 시대 또한 격동의 시대였다. 당시 국가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주체성이 매우 약한 시절이었고, 임금다운 임금이 없어 민족정기도 상실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구하고자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스님은, 세속 일에 아무런 관계를 하지 않고 오로지 불교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다만,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에게 만은 개국축하표문을 써주었다. 당대 존경받는 고승의 축하표문은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는 많은 반대파들을 누르는데에는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불교의 고승들이 세속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아귀들처럼 다툼하는 일에는 진리가 없다는 곧 '무집착의 깨달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염병의 소용돌이에 온세상이 혼란한 2020년 봄이다. 이런 때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라면 '어떤 깨달음의 말'을 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도 머지 않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고승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과 우주진리에 대한 탐구로 깨달음을 향하여 참선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할지 모르겠다.

 

지난 1980년대 민주화를 짓밟은 군사정권시대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수행하던 성철스님은 당시 무소불위의 정권을 휘두르던 전두환대통령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오로지 수행과 제자들을 가르치는데에만 온 정성을 쏟았다. 그는 세상이 그렇게 민주화를 외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속에 살았지만, 세상일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 또한 지나갈 일이고 수행자에게는 진리를 깨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성철 스님이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서 세상을 향하여 한 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새삼 떠오른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