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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임금 ‘생로병사의 비밀’

《왕의 한의학》, 이상곤, 사이언스북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전하!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어 부디 옥체를 보전하소서!”

사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사다. 지금도 대통령의 건강은 일급비밀에 해당하지만, 왕조시대 한 나라의 지존이었던 임금의 옥체(玉體)를 살피는 일은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는 국가지대사였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어의(御醫)들에게 진료를 받고 뭇 백성은 구경도 하기 힘든 진귀한 탕약을 매일같이 복용해도, 그 옥체를 보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즉위하기까지 받은 스트레스로 임금이 될 무렵에는 이미 몸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임금이 되고 나서도 각종 압박과 과로에 시달리며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금으로 사는 것’도 어렵지만, 임금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임금의 고뇌와 근심은 줄곧 병이 되어 심신을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내려진 진료와 처방은 그 자체로 진귀한 사료이자 사관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임금들의 내밀한 감정까지 보여주는 솔직한 기록이다.

 

현직 한의사 이상곤이 쓴 이 책, 《왕의 한의학(사이언스북스)》은 《신동아》 등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으로, 역사학자가 아닌 이가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사료에 기반한 치밀한 논증을 선보인다. 칼럼을 위해 매회 60매 안팎의 원고를 써야 했기에 실록에 거의 진료기록이 없는 태조 이성계나 정종, 단종이나 예종은 자연스레 제외되었다.

 

 

그 외의 임금들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다양한 문헌을 두루 참고하여 건강상태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냈다. 마치 설계도를 보고 지은 집처럼, 사료라는 평면의 기록에서 증상을 토로하는 임금의 모습이 튀어나올 듯 생생히 복원됐다.

 

조선 임금 대부분이 종합병원처럼 각종 병을 달고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타난 3대 질병은 바로 화병과 종기, 그리고 소갈증(당뇨)이었다.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까닭인지 조선 임금들은 대개 성격이 불같고 울화가 많았다. 흔히 ‘속에서 천불이 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렇게 솟아오르는 화증으로 고생한 대표적인 임금이 광해군과 숙종, 경종이다. 특히 광해군의 경우 즉위하기까지의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가 독이 된 탓인지 수시로 울화감을 호소하며 경연도 거의 열지 않았다.

 

종기도 지나친 화기에서 비롯되는 질병이다. 한의학에서는 종기를 화가 내부에서 끓어오르다 피부로 솟아오른 것으로 본다. 대표적으로 문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죽었다. 조선 임금들은 대체로 열이 많은 체질이어서 몸에 열기를 보태는 인삼을 약재로 잘 쓰지 않았는데, 정조는 종기가 낫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인삼이 든 약재를 먹고 급격히 환후가 위중해져 세상을 떠났다.

 

 

소갈증 역시 심장의 기운이 약해져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적절히 발산하지 못해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이 마른 것으로 보았다. 효종과 세종이 소갈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한 대표적인 임금이다. 세종은 소갈증의 대표적인 합병증인 안질까지 심해 재위 말년에는 거의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력이 나빠졌다.

 

병마 있는 곳에 처방 있는 법이니, 이런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동원한 치료법도 가지각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야인건수(野人乾水)’라는 ‘똥물’ 치료법이다. 야인건수는 열이 심할 때 먹으면 관 속에 든 사람도 살아온다고 해서 파관탕(破棺湯)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판소리 명창들이 수련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고 열이 오르면 똥물을 마시는 것도 이런 효과 때문이다.

 

결국 중종 39년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野人乾水)다. 바로 똥물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야인건수는 곧바로 효험을 발휘한 것 같다. 11월 8일에는 박세거가 들어가서 진찰하고 이렇게 적었다. “갈증이 줄어들고 열은 이미 줄었다.” 임금도 이런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어오라 했다.” (p.126)

 

이렇게 처방이 효험이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임금이 승하하는 날엔 어의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어의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고위험 전문직’이었다. 한 예로 효종 때 종기에 침을 놓았던 신가귀는 효종이 억지로 불러내어 침을 놓게 했음에도, 침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효종이 사망하자 교수형에 처해졌다.

 

물론 파격요법으로 건강이 호전될 때는 그에 따르는 부와 명예도 컸다. 한 예로 사극 「마의」의 주인공이었던 백광현은 본디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였으나 종기를 치료하는 실력을 인정받아 30여 년 동안 현종과 숙종, 두 임금을 섬기며 품계가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그러나 지은이가 지적한 대로 치료 과정 전반이 성리학적 통제를 받는 데다 치료결과에 따른 과도한 처벌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 어려웠던 분위기가 한의학의 발전을 가로막았고, 조선 말기로 갈수록 파격요법 대신 일반적인 탕약 위주의 치료법으로 흘러간 것은 아쉽다.

 

지은이는 그 밖에도 독살설이 제기되는 임금들의 건강도 자세히 분석하며 나름의 진단을 내린다. 독살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독살의 아이콘’, 경종이나 소현세자조차 실은 오랜 지병이 의료사고와 만나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것일 뿐, 독살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았다. 인종 역시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선왕의 상을 치르며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체력을 상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렇듯 갖가지 병마와 싸우면서도 임금들은 군주로서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나름대로 건강관리에도 힘썼다. 영조가 실천한 건강관리의 비법을 보면 현대인으로서도 배울 점이 많다. 영조가 83살까지 장수한 비결은 무엇보다 바쁜 일과 중에서도 시간과 방법을 정해 놓고 제때 식사를 하고, 너무 적게 먹는 것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피하며 적당량을 먹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체질에 잘 맞았던 인삼을 평생 챙겨 먹은 것이 주효했다.

 

 

이렇듯 조선 임금조차 건강 비법은 오히려 사소한 습관에 있었다. 식사를 제때하고, 적당량을 먹고, 잠을 잘 자고,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며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은 지금도 어렵지만,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조선 임금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임금으로 사는 인생이 너무나 고단했을 그들의 심신을 생각하면 군주로서의 공과(功過)와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낀다.

 

400쪽이 훌쩍 넘는 이 책은 지은이 이상곤이 한의학 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낸 《낮은 한의학》을 펴내자, 한 기자가 임금들을 다룬 ‘높은 한의학’도 써보라고 제안해 집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높이가 아닌, 역사학자보다 더 빈틈없는 고증과 한의사로서의 전문지식, 자신만의 분석이 더해져 ‘초고도 한의학’이 탄생했다.

 

한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읽기에 여전히 어려운 감도 있지만, 《조선왕조실록》과 한의학이라는 고난도 조합을 이 정도 흡입력 있게 풀어낸 것도 대단한 성취다.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요즘, 왕들의 건강을 살피며 자신의 건강도 돌보는 여름을 보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