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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왕조실록》 속 약자들의 패자부활전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나쁜 남자편》, 최문정, 창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 속 대결에서 패한 자는 왜곡되고, 묵살당하며, 잊혀간다. 지금이야 대권을 잡지 못하거나 정권창출에 실패했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롭진 않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임금이 되지 못하거나 권력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런 냉혹한 시대, 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투쟁에 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역사 속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의 길은 나뉘는 법, 결국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을 아름답고 정의롭게 묘사했고, 약자는 곧 ‘악한 자’로 폄하되어 갖은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나쁜 남자편(최문정, 창해)》은 그런 약육강식의 서사구조에 반기를 든다. 과학교사였던 저자는 불합리한 인사 조치에 우울증을 얻어 휴직의 시간을 가졌다. 약자의 설움을 느끼던 그 시절, 평소 관심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시름을 달랬다. 《조선왕조실록》 속 약자들의 모습은 ‘약하다는 이유로 악한 인간으로 몰렸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부터 역사를 약자의 시각에서 소설로 재구성하기 시작, 《조선왕조실록》 속 ‘나쁜 남자’였거나 ‘나쁜 남자’에게 이용당한 7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이들의 목소리는 더없이 생생하고 절박하다.

 

첫 번째 주인공은 망나니 행동을 계속한 탓에 폐세자된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다. 양녕대군은 공부를 게을리하고 여색을 지나치게 탐해 세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외삼촌 넷 모두가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아버지에게 잔혹하게 주살 당하는 것을 보면서 권력에 염증을 느꼈다. 권력의 생리가 그런 것이라면, 자신은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비행을 일삼아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두 번째 주인공은 역대 최고의 왕후로 칭송받는 세종대왕비 소헌왕후다. 훌륭한 지아비에 영민한 자녀들까지, 모든 것을 가졌을 법한 그녀는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약자였다. 시아버지 태종은 앞으로 즉위할 세종의 치세에서 외척의 득세를 막고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고, 어머니는 관노비로 만들었다. 남편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친정가문은 복권되지 않았고, 그녀는 친정가문이 풍비박산된 아픔을 견뎌야 했다.

 

세 번째 주인공은 세종의 맏아들로 모든 것을 가졌으나 사랑만은 순탄치 않았던 비운의 임금, 문종이다. 동성애 등 불미스러운 문제로 아내를 두 번이나 내쳐야 했고 단종을 낳은 세 번째 아내, 현덕왕후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또한 즉위 2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자식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해 딸 경혜공주는 노비가 되고 아들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 문종이 세 번째 아내 현덕왕후 사후 새로운 왕비를 맞았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종은 현덕왕후를 잊지 못해 왕비 간택을 거부했다. 정작 현덕왕후가 살아있을 때는 살갑게 대하지 못한, ‘나쁜 남편’이었던 것을 후회하면서.

 

네 번째 주인공은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다. 연산군이 포악해진 배경에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컸다. 생모인 폐비 윤씨가 후궁들을 투기하고 아버지 성종을 죽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된 이후, 계비인 정현왕후가 귀하게 길렀으나 생모의 사랑을 완벽히 대체할 순 없었다. 그는 생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면서 폭주하기 시작했고, 광기에 취해 자신을 놓아버렸다.

 

다섯 번째 주인공은 7일 만에 폐위되어 ‘7일의 왕비’로 유명한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다.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 시대 최고의 권신이었으나 연산군이 폐출되며 반정군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남편 진성대군(뒷날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경쟁자였기에 언제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지만, 아버지 신수근의 도움으로 무탈하게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에게 떠밀려 신씨를 폐위시킨 중종은 그들이 죽은 뒤에도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고, 신씨는 평생 곤궁하게 살며 무정한 남편을 그리워했다.

 

여섯 번째 주인공은 중인 출신으로 처음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 숙종의 비, 장옥정이다. 희빈 장씨, 곧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그녀는 악녀라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의 끊임없는 모함을 이겨낸 굳건하고도 자애로운 인물이었다. 주변에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궁녀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살뜰히 챙겼다. 이 책에서는 희빈 장씨의 은덕을 잊지 못한 한 궁녀가 《장옥정전》을 저술하며 그녀를 회고하는 것으로 나온다.

 

일곱 번째 주인공은 방계 중의 방계 왕족 ‘이원범’에서 갑자기 임금이 된 강화도령 철종의 첫사랑, ‘봉이’다. 철종에게는 가난한 나무꾼 시절 혼인을 약조한 첫사랑 ‘봉이’가 있었다. 봉이의 어머니는 이원범의 집안이 너무나 먼 방계 혈통인데다 역모죄에 여러 번 연루된 점을 들어 혼인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던 중 원범이 갑자기 임금으로 추대되어 궁으로 들어가자 봉이는 자신을 궁으로 불러주길 간절히 기다리지만 소식은 없었고, 상심한 봉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정사과 야사가 뒤섞이고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가운데, 아픔을 간직한 이들의 목소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되살아난다. 물론, 기본 뼈대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되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개입된 ‘소설’ 형식인 만큼 허구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런 허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장이 끝날 때마다 ‘그 밖의 이야기’ 시리즈로 실제 역사기록을 다루고, 주인공과 관련된 유물을 별도로 다루는 등 허구와 사실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기록 속 악인이었던 인물이 무조건 ‘문제의 인물’이 아니라 다만 ‘문제적 인물’이었을 수 있으며, 실제로는 그렇게 악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선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 것 자체가 이 책이 선물하는 역사적 상상력이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라도 숨겨진 아픔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고, 누가 봐도 명백한 악인이었던 인물이 알고 보면 나름의 사정이 있기도 하니 말이다.

 

대체로 역사에서 승자는 강하고 아름답게, 약자는 비겁하고 약하게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런 서사구조를 해체하고 완전히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저자가 길어 올린 역사 속 약자들의 패자부활전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소설 속 인물들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사극을 보는 듯, 술술 잘 읽히는 재미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