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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일 잘하는’ 조선왕조의 비밀, 《의궤》

《조선왕실의 보물 의궤》, 유지현 글, 이장미 그림, 토토북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의식의 모범’이라는 뜻의 《의궤》. 이 《의궤》는 영상도, 사진도 없던 조선에서 많은 복잡한 의식과 행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러졌던 비결이었다. 고려에는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한 행사가 끝나면 그 행사의 모든 것을 세세히 정리해 두는 ‘공식 행사보고서’이자, 행사를 치른 적이 없는 이들도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행사를 준비할 수 있는 ‘행사 지침서’였다.

 

 

유지현이 글을 쓰고, 이장미가 그림을 그린 《조선왕실의 보물 의궤》는 ‘의궤’라는 다소 생소한 내용을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에 맞추어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대화체로 된 친근한 설명과 함께 사진과 그림이 풍부히 실려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의궤를 쉽게 이해하는 길잡이로 손색이 없다. 이런 매력을 알아본 독자가 많았던 덕분인지, 2009년 처음 출판됐음에도 아직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책은 모두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의궤를 임금의 탄생, 임금의 활쏘기, 임금의 혼례, 임금의 제사, 임금의 건축, 임금의 행차, 임금의 죽음으로 나누어 각 주제에 해당하는 의궤를 소개한다. 의례와 예법이 발달했던 영ㆍ정조 시대에 많은 의궤가 만들어졌기에,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의궤도 모두 영ㆍ정조 시대의 것들이다. 각 장에서 소개하는 의궤의 내용을 간추려본다.

 

탄생 – 《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

 

‘정종대왕’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 ‘태실’은 태를 보관한 곳, ‘가봉’은 태실을 새로 꾸미는 것을 뜻한다. 곧, 정조대왕의 태를 보관한 곳을 새로 꾸민 뒤 이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정조 임금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훗날 고종 황제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높이면서 ‘정조’로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왕실에서는 엄마와 아기를 이어주던 탯줄과 태반을 귀하게 여겨 버리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 되면 태를 깨끗하게 씻은 뒤 항아리에 넣어 5달 이내에 땅에 묻었다. 태실의궤는 다른 의궤에 견줘 세로의 길이가 길어, 무려 86cm나 되는 것도 있다.

 

(p.14)

태의 보관 순서

⓵ 태를 백번 가량 맑은 샘물로 씻고 향기로운 술로 한 번 더 헹군다.

⓶ 씻은 태를 작은 백자 항아리에 넣고 이를 더 큰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이름표를 붙인다.

⓷ 태항아리를 둥그런 돌 상자에 넣고 태의 주인과 날짜를 적어 돌로 만든 방, 곧 태실에 넣고 묻는다.

 

2. 임금의 활쏘기 – 《대사례의궤》

 

대사례는 임금이 여는 활쏘기 대회를 말한다. 조선시대 대사례가 열린 것은 모두 네 번이었다. 1477년(성종 8년), 1502년(연산군 8년), 1534년(중종 29년), 1743년(영조 19년), 이렇게 네 차례의 대사례가 있었으나 그중 영조만이 이 행사를 의궤로 만들 것을 명했다. 덕분에 이런 멋진 행사를 여전히 생생히 감상할 수 있으니 영조의 어명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1743년 성균관에서 열린 대사례에서 신하들은 관직 순서에 따라 두 명씩 짝을 지어 한 명당 네 발씩 화살을 쏘았고, 심판은 깃발을 들고 있다가 과녁이 맞힌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활쏘기가 끝난 뒤 시상식도 열었으니, 잘한 사람에게는 상으로 옷감과 활을 주고, 못한 사람에게는 술을 주었다.

 

《대사례의궤》에는 임금이 활을 쏘는 장면, 신하가 활을 쏘는 장면, 상과 벌을 주는 장면이 순서대로 자세히 실려 있다. 놀라운 것은 신하들의 성적표까지 적혀 있다는 점이다. 누가 몇 발을 맞췄는지, 왼손으로 쐈는지 오른손으로 쐈는지까지 적혀 있으니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신하들은 자신의 활쏘기 실력이 대대로 박제되는 것이 떨떠름했을 법하다. 이렇게 기록될 줄 알았으면, 평소에 활쏘기 연습 좀 할 걸 그랬다는 때늦은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3. 임금의 혼례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평범한 사람에게도 혼례식은 일생일대의 큰 행사일진대, 하물며 임금의 혼례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남아 있는 가례도감의궤는 1627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가례부터 1906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가례를 기록한 것까지 20여 개가 있다. 그 가운데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를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정밀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이 의궤는 가례도감의궤 가운데 처음으로 2책으로 만들어졌고, 행사의 주요 부분을 그린 반차도만 50쪽에 달한다. 실제 가례가 이루어진 1759년 6월 22일보다 앞선 6월 14일에 반차도가 먼저 완성되었는데, 미리 만든 이유는 바로 예행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반차도를 보며 미리 준비를 마친 영조는 가례 당일, 창경궁을 나와 이현고개를 지나 별궁인 어의궁에 가서 정순왕후를 궁궐로 맞이했다. 반차도의 앞부분에는 임금의 행차가, 뒷부분에는 왕비의 행차가 그려져 있는데, 눈길을 끄는 부분은 ‘부련’이라는 빈 가마다. 부련은 왕이 타고 있는 가마보다 먼저 등장하는 빈 가마로, 사고에 대비해 적들을 교란하는 장치였다.

 

왕비의 가마가 등장하기 전에 왕비를 상징하는 물건을 실은 가마들도 차례대로 선을 보였다. 왕비 임명서를 실은 교명요여, 왕비를 책봉한 사실을 기록하고 왕비의 공덕을 기린 옥책을 실은 옥책요여, 왕비의 도장을 실은 금보채여, 왕비의 옷을 실은 명복채여 등이었다. 행사에 필요한 의자(교의), 받침(각답), 주전자(관자), 그릇(우자)를 든 사람들도 보인다.

 

4. 임금의 제사 – 《종묘의궤》ㆍ《경모궁의궤》

 

임금이 역대 임금과 왕비들을 모신 사당인 종묘에 가서 제사를 치르는 의식이 ‘종묘제례’다. 일 년에 다섯 번 치러지는 종묘제례는 임금뿐만 아니라 왕세자, 신하, 무용수, 악기연주자 등 7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종묘제례는 매번 거의 같은 형식으로 치렀기에 제례 때마다 의궤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어떤 변화가 있을 때는 의궤를 새로 만들기도 했는데, 주로 종묘의 건물을 고쳐 지을 때였다. 모셔야 할 임금의 신주가 늘어나면서 종묘의 건물은 옆으로 계속 증축되어 지금처럼 가로로 긴 형태가 되었다.

 

제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의궤로는 임금이 땅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지내는 제사인 ‘사직제’를 정조 시대에 기록한 《사직서의궤》가 있다. 또, 임금이 되지 못해 종묘에 오를 수 없었던 사도세자를 위해 아들 정조가 지은 사당인 ‘경모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도 의궤로 남아 있다. 《경모궁의궤》는 종묘제례와 달리 새로 생긴 행사라 제사의 형식과 제례에 쓸 악기를 새로 만들어야 했는데, 경모궁 제사에 쓸 악기를 만든 기록이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에, 사도세자에게 지낸 제사에 관한 기록이 《경모궁의궤》에 실려 있다.

 

5. 임금의 건축 – 《화성성역의궤》

 

정조는 화성(오늘날의 수원)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고 새로 성을 쌓았다. 《화성성역의궤》는 이 성을 쌓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그 내용이 무척 상세해 한국전쟁 때 크게 파괴된 화성을 이 의궤를 참고하여 복원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화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건축과 관련된 의궤 가운데서도 가장 내용이 풍부하다. 화성 공사와 관련된 공식 문서는 물론, 참여한 인원과 사용된 물품, 설계에 관한 기록과 그림이 함께 실려 있어 말 그대로 종합 공사보고서다. 내용이 얼마나 자세한지, 공사에 사용된 모든 물건의 값과 크기는 물론이고,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 1,800여 명의 이름과 주소, 일한 날 수와 받은 임금까지 기록되어 있다. 기술자들은 이런 기록이 무서워서라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을 것 같다.

 

6. 임금의 행차 –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는 이렇게 애써 지은 화성에 자주 행차해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곤 했다. 그런데 1795년에는 아주 특별한 행차를 준비했으니, 바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화성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비록 살아서 환갑을 맞이하지는 못했으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동갑이었기에, 이 환갑잔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임금이 된 아들 정조가 어머니와 아버지, 둘 모두에게 바치는 잔치였던 셈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바로 이 을묘년에 있었던 정조의 화성행차를 보여주는 자료다. 보통 의궤는 사람이 손으로 쓰고 그림을 그려 5부 정도를 만들었지만, 이 의궤의 글은 ‘정리자(整理字)’라는 금속활자를 이용해 100부를 찍어 오늘날까지도 다른 의궤에 견줘 많은 수가 남아 있다. 목판으로 인쇄한 이 의궤의 그림은 모두 흑백이지만, 그 밖에 화원들이 직접 손으로 그린 병풍과 두루마리에서는 아름다운 색감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가 참여한 화성행차 반차도에서는 사람이 1,779명, 말이 779마리나 등장하는데 실제로 행사에 참여한 사람은 이보다 많은 6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효도잔치를 위한 행차에 걸맞게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위해 가마도 사람이 메고 가는 것과 말이 끌고 가는 것, 두 종류로 만들었고 혜경궁이 드실 미음 등의 음식을 담은 마차 ‘수라가자’도 별도로 마련했다.

 

7. 임금의 죽음 – 《정조국장도감의궤》

 

임금의 장례는 나라의 중요한 장례란 뜻으로 ‘국장(國葬)’이라 했다. 1800년에 세상을 떠난 정조의 국장을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국장과 관련된 다양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의 시신이 실려 있는 가마인 ‘대여(大轝)’, 대여 옆에서 악귀를 물리치는 ‘삽’이라는 부채를 들고 가는 사람들, 임금이 편하게 저승길을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대나무 말인형 ‘죽산마’, 악귀를 쫓기 위해 쓰는 탈 ‘방상시’를 쓴 사람 등이 눈길을 끈다.

 

 

국장은 다른 행사에 견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의궤도 아주 자세히 만들어야 했다. 보통 임금이 승하하면 장례식 전체 과정을 담은 《국장도감의궤》와 왕릉에 묻기 전 주검을 안치하고 조문객을 맞는 빈전을 기록한 《빈전도감의궤》, 왕릉을 만든 기록인 《산릉도감의궤》의 세 가지가 동시에 만들어졌다.

 

이처럼 의궤는 왕실 행사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미리 의궤를 보며 꼼꼼히 준비하여 무리 없이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 사진도 영상도 없던 시절, 《의궤》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행사를 ‘글로 배운’ 상황에서 실수가 속출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행사에서 실수해도 기껏해야 해고를 당하는 정도겠지만, 왕조시대에는 책임자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결국, 《의궤》는 이런 희생을 최소화하고 앞으로 행사를 이끌어나갈 후대를 생각하는 배려 가득한 기록이었다. 조선왕조는 이런 점에서 참 ‘일 잘하는 왕조’였던 셈이다. 인수인계가 이렇게 풍부한 자료를 통해 이루어지니 많은 시행착오와 낭비를 줄일 수 있었고, 일하는 이들도 자신의 일처리가 기록을 통해서 남는 만큼 더 철저히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개인도 중요한 과업이나 행사를 완수하고 나면 ‘의궤’를 남겨 후대에 전해보면 어떨까. 요즘은 사진과 영상이 있으니 굳이 그림 실력이 없어도 되겠다. 사진과 꼼꼼한 설명, 각종 자료를 엮어 한 권의 《~~의궤》로 남기는 발상,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