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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현상금 360억 원, 의열단장 김원봉

[맛있는 서평] 《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가디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현상금 100만 원.

일제가 약산 김원봉을 잡기 위해 내건 현상금 액수다. 백범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 60만 원의 약 두 배, 오늘날의 값어치로 자그마치 36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일제가 김원봉을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그러나, 약산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현상금 360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끊임없이 위험한 일을 도모해야 하고, 밀정은 판치는 가운데, 한번 잘못 발을 디디면 그걸로 끝인 살얼음판. 그는 그 아슬아슬한 빙판 위를 걸어 해방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쩌면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이 오히려 약산의 영화로운 한때였을지도 모르겠다. 해방 정국에서 그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고,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친일 경찰로 악명 높은 노덕술에게 끌려가 일제 치하에서도 당하지 않았던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했던 약산의 삶이 《타짜》, 《식객》 등 만화로 유명한 허영만 화백의 펜 끝에서 생생히 되살아났다. 약산의 일대기를 그린 이 만화, 《독립혁명가 김원봉(가디언)》은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아 진행된 성남시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의 하나로 탄생했다.

 

 

책은 약산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1919년부터 펼쳐진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약산은 22살로 군사학 공부를 위해 중국 남경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그는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작지만 강한 단체를 결성해 일본에 대항할 것을 결심했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총기 다루는 법과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이때 사귄 이들은 약산과 평생을 함께한 동지가 됐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약산을 위시한 10명의 동지는 만주의 추위를 뚫고 한 집에 모였다.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밤새 토론이 오간 끝에, 새벽이 밝아올 무렵 ‘작지만 강한’ 조직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이 합쳐진 ‘의열단’이었다. 약산은 의열단 단장으로 뽑혔다.

 

 

이들은 공약 10조를 내걸고, 마땅히 없애야 할 ‘7가살 5파괴’ 대상도 공표했다. 조국 해방에 목숨을 내건 이들의 살벌한 기백이 느껴진다.

 

(p.27)

               의열단 공약 10조

 

1.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온몸을 바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있는 자라야 한다.

4. 조직의 뜻에 따르고 조직원끼리의 의리를 최우선으로 한다.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한 번씩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부름에 답한다.

8. 죽음을 두려워 말고 조직을 위한다.

9. 하나가 아홉을 위하고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한다.

10. 조직의 뜻을 어긴 자는 처형한다.

 

밀양 경찰서를 폭파하려던 첫 번째 거사는 사전에 정보가 유출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920년 7월,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을 터뜨린 박재혁의 거사가 성공하며 한 줄기 희망이 비쳤고, 뒤이어 밀양에서 최수봉, 조선총독부에서 김익상의 거사가 성공하여 의열단의 존재를 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실패의 아픔도 많았다. 1922년 3월 상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이 일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도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던 김익상은 체포되었고, 20년을 복역했으나 출소 뒤 일경에게 끌려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의열단 활동은 헝가리 출신 폭탄 제조 전문가 ‘마자르’의 도움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는 헝가리군 폭탄 제조 기술자로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다가 여비가 없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알아본 독립운동가 이태준이 그를 중국으로 데려오던 중 소련군을 만나 이태준은 처형되고 마자르만 살아남았다.

 

의열단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에 마자르를 데리고 가서 비밀 폭탄 제조소를 만들었다. 마자르가 만든 폭탄은 의열단이 그때껏 쓰던 폭탄과 질이 달랐다. 위력이 강하고 불발탄이 적었다. 폭탄의 질이 좋아지면서 거사 성공 확률도 높아졌다.

 

의열단이 활약할수록 일제는 의열단원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의열단원은 오히려 위험을 즐겼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만큼 항상 멋진 양복과 중절모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의 기회가 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p.116-119)

의열단원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매우 젊은 집단이었다. 의열단원이 되었다는 것은 조국 해방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성실했고 당당했다. 종교 집단의 신도들처럼 생활했고, 운동을 통해서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을 사는 젊은이들이기에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즐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고급 양복을 입고 한껏 멋 부리고 살았다. …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날 때는 동료들과 조상에게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고했다. … 이렇게 단단한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신변 보호는 완벽했는데도 김원봉은 거처를 하루에 한 번씩 옮겨 다녔다. 심지어는 김원봉을 대면해보지 못한 의열단원도 많았다.

 

 

1919년 창설 이후 4년 동안의 투쟁을 통해 의열단의 존재감을 충분히 알렸다고 생각한 약산은 암살과 파괴 뒤에 숨겨진 의열단의 정신을 표현할 선언문을 원했다. 의열단의 초청으로 북경에서 상해로 온 신채호는 폭탄 제조 시설을 확인하고 1달 동안 여관에 박혀 한국 독립운동사 불후의 명작, 《조선혁명선언》을 썼다.

 

김원봉은 크게 만족했다.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은 항일 투쟁 노선을 확립하고 한층 더 강화된 이념적 지표를 갖게 됐다. 의열단 투쟁 시에는 반드시 이 조선혁명선언을 뿌리도록 했고, 국내로도 밀반입해 대거 유포했다.

 

그 이후로 1923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거사 성공, 폭탄 국내 밀반입으로 인한 황옥 등의 체포, 김지섭의 일본 황궁 거사 실패,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거사 성공 등 부침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926년 3월, 약산 김원봉 이하 의열단원들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각종 의열단 활동들은 막을 내렸으나, 중국의 항일운동과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계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도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김원봉이 꺾인 것은 막상, 해방 이후였다.

 

독립운동의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건너간 지 27년 만에 돌아온 조국이었지만, 해방 정국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미군정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 위주로 대세가 기울며 김원봉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3월 22일, 약산은 악질 친일 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중부경찰서로 끌려갔다.

 

비록 4월 9일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가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약산은 풀려난 뒤 전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서 꼬박 3일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현상금 수백억이 걸려 있을 때도 잡히지 않았던 노덕술에게 해방 후 끌려가다니, 그가 느꼈던 통분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1948년 4월 9일, 김원봉은 스님으로 위장해 가족과 함께 월북한다. 책은 김원봉의 월북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며 막을 내린다. 첫째는 신변의 위협, 둘째는 정치 상황의 변화, 셋째는 1947년 군정 경찰의 체포령, 넷째는 북한에 포진하고 있던 약산의 예전 동지들, 다섯째는 북한 정권 실세 최용건 관련설이다.

 

그 이후 정쟁과 이념의 그늘에 가려 응당 박수받아야 할 약산의 독립운동 행적마저 묻혀버렸다. 그러나 한민족이 희망을 잃고 기죽어 지내던 시절, 의열단이 일깨운 독립에 대한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의열단원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의 꿈을 향해 내달리게 했던 김원봉의 지도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김원봉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김성숙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p.270)

김원봉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김원봉과 김구는 닮았습니다.

 

백범 김구와 쌍벽을 이루는 독립운동가임에도 월북 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약산 김원봉. 비록 중간중간 이야기와 상관없는 학살 장면 등이 삽입된 것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작위적인 편집으로 보여 아쉬운 대목이나, ‘의’를 ‘맹렬히’ 실천했던 약산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책장을 덮을 때쯤, 귓가에 맴도는 그의 음성을 느껴보자.

‘고맙소.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