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버드나무 가득했던 수렁을 톱과 쇠스랑으로 일궈 논을 만드시는 여름날의 아버지, 그 논에서 쌀을 수확해 가을볕에 말리는 아버지, 낡은 지게로 땔나무를 지어 날라 장작불을 지피는 한 겨울의 아버지...
강원도 화천 깊은 산골짜기 집에서 일곱 식구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는, 그러나 아버지이기 이전에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감춰진 역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영어의 몸이 된 투쟁가였다.
다섯 살 아이였을 때는 영문도 모른 채 가족과 친척,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간 제주 4.3의 피해자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라산 자락으로 군경과 토벌대를 피해 피난 갔던 유년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이제 산골의 늙은 촌부가 된 ‘아버지’를 끝내 따라다녔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농부로, 또 시인으로, 투쟁가로 쉼 없이 여러 면면의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아간다.
아들이 그 아버지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아버지와 나 사이는 내가 열일곱 살이 된 어느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늙고 처진 아버지의 살갗을 보고 울컥하던 순간, 관계의 변화를 직감했다. 그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다.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카메라 렌즈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늘 아버지를 향했다. 연민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한 남자로 바라보고자 애썼다. 산골에서의 일상부터 제주에서의 4.3진상규명운동과 평화통일운동가로서의 모습까지를 10년 여 동안 쫓으며 사진에 담았다.
아들 김일목이 제주 4.3의 피해자인 아버지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나를 품은 살갗>은, 2020년 사진가들이 주는 사진상인 ‘온빛다큐멘터리’ 신진사진가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기록함과 동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지난 역사를 비주얼스토리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평단으로 참여한 국내 굴지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부터 높은 평을 받았다.
톺아보면, 제주 4.3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럴 수 있게 되자, 다양한 시선과 형식으로 사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개인인 아버지의 삶을 통해 제주 4.3이라는 큰 역사를 이야기하는 김일목의 <나를 품은 살갗>은, 오래도록 조용히, 다큐멘터리사진가로서 꿈을 키워온 청년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못한 선물이다. 전시는 10월 5일부터 17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린다.
*전시 문의 : 02-720-2010
<작가 김일목 소개>
김일목은 1994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었다. 자급자족과 농업이 인류사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17살 때 전국 각지에 있는 토종씨앗을 채집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특히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땅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사진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래도록 인연을 맺어온 임종진 사진가의 활동을 지켜봐 온 것도 영향이 컸다. 특히 단지 기록으로서만이 아닌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사진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추구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사진과 각양각색의 현장에서 작업하는 사진가는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사진으로 2010년 아버지를 처음 담았고, 11년을 찍었다. 현재는 강원도 화천지역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4년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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