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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왜 하필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였을까?

‘캠프 넘버 원, 거제도 포로의 일상’ 사진전 열어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종대)은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관장 이수권)과 함께 2021년 10월 15일(금)부터 2022년 3월 31일(목)까지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에서《캠프 넘버 원, 거제도 포로의 일상》 공동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공동기획전은 거제시에서 UNESCO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수집한 NARA(미국 국립문서보관청) 소장 포로수용소 관련 기록 사진을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 개관 22주년을 맞아 전시하는 자리이다.

 

사진 속에 담긴 포로의 삶은 어땠을까?

 

6.25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체결된 전쟁 포로의 대우를 명시한 제네바 협약(제3협약, 1949.8.12.)이 처음 적용된 전쟁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포로 관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또 다른 전쟁을 벌였다. 포로 관리 실태는 국제적십자의 점검 대상이자 전쟁 실적을 과시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 사진을 남겼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거제도에 수용됐던 전쟁 포로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 자료들이다. 이번 전시는 NARA(미국 국립문서보관청)에서 소장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관련 사진들을 중심으로, 포로들의 수기와 인터뷰를 통해 전쟁 포로의 처절한 삶을 재현하고자 했다.

 

 

 왜 하필 거제도였을까 ?

 

1951년 거제도에 ‘캠프 넘버 원’이 설치되었다. 우리나라 제1의 포로수용소, ‘캠프 넘버 원’은 왜 하필 거제도에 설치되었을까? 최초의 수용소는 임시 수도 부산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점점 늘어나는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에 부산은 부적합했다. 이에 유엔군은 새로운 수용소 부지로 거제도와 제주도를 고려하다가 결국 거제도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고, 급수가 용이하였기 때문이었다.

 

거제도 전체 면적(약 403㎢)의 1/60(약 6㎢)에 해당하는 크기의 포로수용소는 4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졌다. 각 구역은 6, 7, 8, 9라는 숫자로 구분 지었는데, 왜 1이 아닌 6부터 숫자를 매겼을까? 1950년 7월 먼저 생긴 부산 포로수용소가 다섯 개의 구역으로 구성되면서 1~5까지의 숫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1951년 1월 문을 연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6부터 9까지의 숫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가장 좋았던 일은 아버지가 면회 왔던 일’

 

포로수용소에는 17만 명의 포로와 3만 명의 관리자 등, 거제 원주민의 두 배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포로의 대부분은 중국군과 인민군 등 북측 군인이었으나, 군인이 아니어도 유엔군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한 경우 포로가 되었기에 여성과 아이들도, 피란민도 있었다. 다양한 국적과 이념만큼 포로들에게는 다양한 사연이 있었다. 특히, 인민군으로 잡혀 포로가 된 아들과 포로수용소 문관(행정 인력)이 된 아버지의 가슴 절절한 상봉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포로수용소에 살게 된 군인, 행정 인력, 통역원, 교육 교관, 의사, 사제 등도 있었다. 이들의 흔적은 포로수용소에 아직도 남아있는 무덤의 묘비, 그들이 남긴 편지와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란민이 되느니 포로가 되는게 낫다’

 

포로의 생활은 어땠을까? 수용소는 이른바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다. 포로 중에서 뽑은 간부를 통해 포로를 관리하였으며, 포로들은 방송반과 신문반을 꾸릴 수도 있었다. 또한 포로들은 직접 작물을 가꾸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포로의 생활은 전쟁으로 굶주림이 일상이 된 수용소 밖의 삶과는 달랐다. 포로들은 하루 세끼의 식사뿐만 아니라 담배도 제공받았으며, 전투에 나가 생사를 오갈 일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국군이 되는 것보다, 피란민이 되는 것보다 포로가 되는 것이 낫다고들 했을까? 또한 포로들은 일과 안에서 한글 및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음악, 미술, 체육 등 다양한 여가 생활을 누렸다. 

 

계속되는 일상 속에서 포로들의 그림, 공예품 등을 전시하는 박람회, 포로들이 직접 기획하고 공연하는 음악회, 연극, 포로들을 위한 일종의 체육대회인 포로올림픽이 열리는 특별한 날도 있었다. 6․25 전쟁 포로의 삶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캠프 넘버 원’ 에서는 포로수용소의 공간 구성과 그 안에서 생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2부-포로의 생활’에서는 포로의 하루 일과와 특별한 행사가 진행된 날들을 소개한다.

 

사진 및 영상 아카이브 자료 등 총 80여 점을 선보인 전시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낯설지만 평범한 포로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포로들이 느꼈던 슬픔, 기쁨 그리고 희망에 공감하며 다시금 평화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