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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금산 불이에서 야은 길재 선생을 만나다.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祠宇),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우리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1353~1419) ‘회고가(懷古歌)’-

 

며칠전,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는 청풍서원에  다녀왔다. 서원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석비와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2층의 보호각이 시선을 끈다.  백세청풍비는 1761년(영조 37년) 당시 금산군수가 군내의 유림과 후손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세웠다. 백세청풍이란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사당 앞에 세운 비석에 새겨진 글로 <맹자>에서 유래한다. 맹자가 백이를 칭송하면서 쓴 표현이라고 전하는데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선비의 절개를 뜻한다.

 

동방의 ‘백이숙제’라고 일컬어지는 야은 길재 선생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목은 이색, 포은 정도전과 함께 고려의 충신으로 평가되는 인물로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그의 문학과 관련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재 선생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시를 지어 고려의 앞날을 걱정했다. 선생은 이방원이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응하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서원 경내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지주중류(砥柱中流) 비(碑)가 서있는데 지주증류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국 황하강의 지주(砥柱)라는 바위는 천만년의 거친 물결 속에서도 그 위용이 변함없이 준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은 백이숙제와 같다하여 백이숙제 무덤 앞에 지주증류 네 글자를 새겨 세웠다. 야은 길재 선생도 동방의 백이숙제라하여 후학들이 1578년 네 글자를 모사하여 구미시 라월봉에 세워 선생의 높은 절의와 밝은 학덕을 기념한 것을 1948년, 다시 탁본하여 사당 앞에 세워 후세들의 마음을 강화하고 격려하는 지주로 삼고 있다. 비에 갓이 없는 것은 천연의 바위인 지주를 뜻함이다.”

 

청풍서원 안에는 청풍사(淸風祠)가 있는데 이는 1678년(숙종 4), 지방 유림들이 선생의 청절(淸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청풍서원에서는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을 맡아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인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6년과 1979년에 금산군의 지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안의 청풍사에는 길재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그저 돌비석이 있는 경내만 돌아보고 발길을 돌리게 하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전국의 서원과 사당의 경우 대부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겉모습만 보게 되어 있다. cctv가 잘 되어 있고 국민의 의식도 높은 지금,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이나 당시의 교육기관인 서원 내부를 볼 수 없게 자물쇠로 꽁꽁 잠가 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모처럼 찾은 그 지역의 서원과 훌륭한 인물의 영정을 볼 수 있는 사당문이 잠겨 있어서야 어찌 그곳에 모셔져 있는 인물을 흠모하고 본받을 수 있을 것인가!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곳의 문을 여는 때는 “해마다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는 때”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크고 훌륭한 서원 건물과 사당 등  정원 공간을 갖춘 곳이 제사의 공간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길재 선생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기물파손'에 대한 우려때문인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