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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의 벽파란 누구인가?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5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제7회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지난 12월 12(일), 서울 삼성동에 있는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작년에는 감염병으로 인해 대회 자체가 열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올해에는 비(非) 대면(對面)으로 실시하는 영상 심사로 예선을 거친 뒤, 본선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2021년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돌림병 확진자가 줄어들기는커녕, 또 다른 새로운 이름의 병균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어서 매우 불안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철저히 방역해 가며 대회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년에 견줘 다소 출전자들이 줄기는 했어도 100여 명 이상이 참가신청을 냈다고 하니 벽파 대회의 위력은 나름대로 살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제7회 대회에서 명창부의 대상은 서도좌창 가운데서 초한가(楚漢歌)를 힘차게 부른 최은서가 차지하였다.

 

초한가란 어떤 노래인가? 아니 그보다도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벽파(碧波)>란 무슨 뜻이고 누구를 일컫는 이름인가? 벽(碧)은 푸르다는 의미, 또한 파(波)는 물결이라는 의미여서 벽파란 <푸른 물결>을 뜻한다. 바로 경기민요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창배 명인의 아호(雅號)인 것이다.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경서도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전공자들이 대부분임에도 벽파나, 또는 이창배 명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듯해서 아쉬웠다. 특히 경서도 소리를 전공하고 있는 중, 고등부 학생들이 이 분야의 대가, 벽파 선생을 모르고 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학생들 뿐 아니라 일반부나 명창부에 참가한 출전자들도 벽파의 활동이나 그 계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 대회에 임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이번 속풀이는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와 관련하여 벽파 이창배 선생은 어떤 삶을 살았고, 경서도 소리를 위해 어떠한 운동을 펼쳐 왔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해 보기로 한다.

 

1940년대를 전후하여 1980년대 초까지 한국 경서도 민요의 중흥을 이끈, 벽파 선생은 1916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출생하였다. 지금은 서울 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네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많이 듣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나, 학교에서는 일본 노래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고 고모부로부터 퉁소와 단소, 피리 등 우리의 전통악기들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도소리의 김수영(김정연의 언니) 명인이 <관산융마>라는 시창를 부르고 있고, 그 옆에서 벽파 선생이 단소로 반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단소로 그 어려운 가락이나 또는 떠는 소리 등을 반주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너무도 놀랐던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는 소리를 하는 소리꾼으로의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의 모습을 좀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나이 20살 전후에는 공업고교를 졸업하면서 체신국의 측량기사가 되는데, 이 무렵부터 왕십리패, 뚝섬패 명인들이 드나들던 동네 공청에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원범산과 최경식과 같은 당대 대가들에게 잡가와 가사를 배웠고, 왕십리 산타령의 명수였던 이명길이나 탁복만에게 산타령을 배워서 그 소리를 오늘에 이어준 사범으로 유명하다.

 

해방을 맞이한 1945년, 벽파는 전문적인 소리꾼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체신국의 측량기사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악부의 민요부원, 구황궁 아악부의 촉탁, 그리고 국립국악원 예술사를 거치면서 경서도 소리와 노래말의 정리를 계속하였다. 특히 1955년부터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서 경ㆍ서도소리 담당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종로 3가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워 경서도 입창과 잡가, 각 도(道)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벽파가 세운 민요 학원, 청구고전성악학원은 종로 3가 골목길에 있었다. 조그마한 2층집이었는데, 협소해서 그다지 많은 사람이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모두 그 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그곳을 거쳐 나갔다.

 

벽파가 민요학원을 개원하던 당시만 해도 민요계는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전해졌다. 특히 어려운 고사(古事)나 한문 구(句)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왔기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가 허다하였다. (다음 주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