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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풍경 따라 바람 따라, 제주를 누비다

《풍경 따라 떠나는 제주기행》, 현길언 글ㆍ강부언 그림, 솔과학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바람처럼 그는 오늘도 섬의 이곳저곳을 누빈다.

무심히 긴 수평선, 바다를 찌르는 곶들,

방풍을 위해 수고로이 쌓은 끝없는 돌담,

앙상한 해송들, 마지막 남은 작은 초가집,

꽃이 다 날아가버린 황량한 억새 들판, 묵묵한 오름들, 그리고 무엇보다 구름들,

아니 바람결, 바람이 헤집어 놓은 구름장 사이로 쏟아지는 하늘빛을 그는 만난다.

 

- 머릿말중에서 -

 

 

그렇다. 이 책은 화가 강부언이 섬 이곳저곳을 누비며 그린 그림에, 작가 현길언이 글을 덧댄 한 폭의 시화다. 강부언은 ‘삼무일기(三無日記)’라는 표제를 내걸고 그림을 그려왔다.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는 뜻의 ‘삼무(三無)’는 제주도 사람들의 강한 자생력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제주 특유의 삶의 방식이다. 강부언은 이런 삶 속에서 느낀 그날그날의 감상을 화폭 위에 거침없이 담아냈고, 현길언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시를 읊듯 그에 어울리는 글을 풀어냈다. 그 가운데 특히 마음을 울리는 풍경 몇 폭을 소개해본다.

 

# 올레길

제주 걷기 열풍을 불러왔던 ‘올레길’. 올레길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말이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뜻밖에 드물다. 예로부터 제주 집은 길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고, 큰길가에서 그 집에 이르는 좁은 길을 ‘올레’라고 했다. 대부분 올레가 길수록 살림에 여유가 있었다. 올레에서 지붕을 덮기 위한 줄을 꼬기도 하고, 말과 소를 잠시 매어두기도 하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올레 들머리에는 늙은 팽나무나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아 마을 사람들의 모임터를 만들기도 했다. 그 올레를 더욱 정겹게 만드는 것은 양편 돌담이다. 그 집 올레에 들어서면 그 집 분위기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올레는 식구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정겨운 돌담길이다.

 

(p.69)

올레는 제주의 역사와 제주사람의 마음 그대로이다. 박토 위에서 모질게 살아왔던 제주사람들의 휴식이 이 올레에 고여 있다. 옛 풍물 사진에서라도 올레를 보면 편안하고, 무거운 적막이 고여 있는 듯하면서도 깊고 아늑하다.

 

# 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제주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볼 수 있는, 제주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 돌하르방의 유래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남방계라고도 하고, 북방 몽고가 근원지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을 돌로 대신한 것이라고도 한다.

 

 

유래야 어떻든, 돌하르방은 제주 사람들의 내면과 표정을 담고 있는 말 없는 벗이다. 수많은 감정을 속으로 삭이며 살아온 듯, 무심한 표정과 뚝심 있는 모습에 한편으로는 든든함을, 한편으로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p.121)

돌하르방은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들어진 영감의 석상이다. 표정 없는 얼굴에 벙거지를 쓰고 눈을 내리뜬 그 모습은 미련스럽기도 하고 무심하기도 하고, 뚝심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 해넘이와 해돋이

제주의 해넘이(일몰)와 해돋이(일출)는 유난히 아름답다. 글쓴이는 예전 제주시에서는 서부두 방파제가 명물이었다고 추억한다. 지금처럼 공원이나 놀이터가 많지 않았던 시절, 제주 시내 사람들의 산책로는 서부두 방파제가 유일한 곳이었다. 저녁이 되면 이 방파제는 낙조로 물든다. 사라봉 낙조는 예로부터 낙조 명소로 유명했다. 한편 제주 해돋이는 단연코, 성산포 일출봉이 으뜸이었다.

 

 

(p.37)

제주 일출을 보려면 성산포 일출봉으로 오르는 입구 잔디밭이 제격이다.

눈앞에 소처럼 누워있는 우도(소섬)의 낮은 구릉을 지나 그 건너 수평선으로 붉은 기운이 마치 부채살처럼 퍼지면서 불덩이가 피어오르다가 그 기운이 차차 짙어진다. 수평선이 온통 지독한 화염에 휩싸여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붉은 불덩이가 툭 튀어나온다. 들끓던 수평선이 해산의 고통에 울부짖던 임산부가 막 해산을 마친 뒤에 얻는 그 편안한 얼굴처럼 조용해진다. 그렇게 들끓던 화염이 사라지면서 온통 바다는 은빛 수를 놓은 듯이 눈부시다.

 

글쓴이와 그린이가 안내하는 제주의 매력은 이처럼 생생하고, 또 서정적이다. 그린이의 붓끝에서 전달되는 제주의 원시적 생명력과, 글쓴이의 펜끝에서 전달되는 서정적 감상은 제주를 당장이라도 찾고 싶게 만드는 신비한 마력을 지녔다.

 

어느새 곧 2022년, 새로운 임인년의 해가 떠오른다. 새해를 맞아 제주에서, 바다가 토해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한 해를 시작할 힘을 얻어보면 어떨까. 풍경 따라 거닐며, 기가 막힌 제주의 풍경을 만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