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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선생은 소리꾼으로서는 흔치 않은 학자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5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제7회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 관련 이야기로 <벽파(碧波)>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벽파란 경서도 명창 이창배 선생의 아호(雅號)라는 점, 1916년 서울 성동구 출생이며, 원범산과 최경식에게 잡가와 가사, 이명길, 탁복만에게 산타령을 배워서 오늘에 이어주었다는 점, 해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경서도 소리 공부를 하였고, 1955년에는 종로 3가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워 경서도 입창, 잡가, 속요들을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당시 전문인, 비전문인 등이 모두 이곳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1960년대, 선소리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벽파는 김순태, 김태봉, 정득만, 유개동 등과 함께 이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되면서 그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음대 이혜구 교수, 국립국악원장 성경린 등과 함께 《국악대전집》과 《민요삼천리》를 펴냈다. 또한 1976년까지 《가요집성》을 7차례 증보하여 경서도 소리의 전범(典範), 《한국가창대계》를 출간하였다. 이것은 경서도 소리를 위해 매우 유용한 저서로 지금까지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대부분 국악 분야가 그러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ㆍ서도 민요는 일반인의 몰이해로 인해 더더욱 냉대를 받아온 분야였다.

 

그래서일까?

 

벽파는 우리 민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민요 속에 한국인의 혼(魂)이나, 사상이 들어있고, 생활 속의 감정과 철학이 녹아있다고 믿어 왔기에 후진들에게 제대로 우리의 민요를 전승시키고자 노력하였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세운 청구고전성악학원은 잊혀가는 민속의 가락들을 되살려 널리 보급하고, 노랫말의 정리 사업 등 현실적인 노력과 열성을 다해 온 것이다.

 

1978년도, 광복 30돌을 맞이하면서 당시 나는 <충청일보>에 특별기획물로, 「국악 한 세대 어디까지 왔나」란 제목의 연재물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경ㆍ서도소리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원고 구성 차, 벽파 선생이 운영하던 종로 3가의 <청구고전성악학원>을 방문해 선생과 대담을 진행하였다.

 

선생에게 <민요의 정의>를 묻자, 선생은 잠깐의 머뭇거림이나 지체도 없이 “민요란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대중의 노래지만, 언제 곡조를 짓고, 누가 가사를 만들었는지 모르며, 입과 입,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시대의 생활상과 감정들을 반영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요”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날까지도 그때 그의 열정적인 표정을 잊지 못한다. 이러한 노래가 곧 벽파가 생각해 온 민요의 세계였던 것이다.

 

 

2012년, 6월, 성동구 소월 아트홀에서는 <성동구>와 <한국전통음악학회>가 함께 주최한 “벽파 이창배,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라는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발제자와 토론자는 다음과 같았다.

 

서한범 「벽파, 누구인가?」

이상만 「벽파의 경기소리 보급활동」

권오성 「음악학에 끼친 벽파의 업적」

이보형 「벽파와 무형문화재」

송은주 「벽파 음 악의 특징」

김문성 「이창배 명창의 음악활동 고찰」

 

나는 학술대회 발제를 통해서 벽파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첫째, 선생은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다. 전통예술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해 오던 그 시절에도 동료, 제자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고, 방송하면서 소리판 중심에 서서 경ㆍ서도 소리를 지켜냈던 소리꾼이었다. 오늘날, <선소리산타령 보존회> 이름으로 발표회가 해마다 열릴 수 있는 바탕도 알고 보면, 벽파 이창배를 비롯한 명인들에게 경ㆍ서도 소리를 배운 큰 제자들이 또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타령을 이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둘째, 선생은 학문을 즐기는 학자였다. 1950년대 속요계의 현실을 보면 명창은 있었으나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의 내용이 서로 다르고 발음도 오류투성이었다. 고사(古事)에서 유래된 어려운 사설이나 사자성어들은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부르고 있어서 사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로는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다.

 

 

학문적 바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전수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교정 작업은 벽파에 의해 하나둘 정리되어 갔다. 언제나 가방도 없이 원고 봉투를 가슴에 안고 다니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벽파는 민요의 사설 정리에 온 힘을 기울여 왔다. 《가요집성》, 《한국가창대계》, 《국악대전집》, 《민요삼천리》 등의 논저가 이를 잘 말해 주듯, 벽파는 소리꾼으로서는 흔치 않은 학자(學者)였다고 생각한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