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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오늘은 김지섭 지사가 일왕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까 지금 와서 아무 할 말이 없다. 변호사의 변호도 나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 -도쿄 일왕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뒤 재판에서 한 김지섭 의사의 말-

 

1924년 1월 5일, 김지섭 의사(1884.7.21. ~ 1928.2.20.)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왕궁을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김지섭 의사는 일제 경찰에 잡혀 투옥되었을 때도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라며 당당히 일제를 꾸짖었다.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난 추강(秋岡) 김지섭 의사는 반평생을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열투쟁에 헌신한 독립투사다. 김지섭 의사는 1907년 이후 구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며 상주보통학교 부교원을 지내기도 하고 교남교육회에 참가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금산군수 홍범식(벽초 홍명희의 부친)이 자결하는 상황을 겪으며,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게 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면서, 같은 해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타도하기 위한 활동에 앞장섰다. 그 실천 방법으로 1924년, 도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질 것을 계획하고 상해에서 도쿄로 잠입하던 도중, 이 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 왕궁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여 이중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이뤘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 상해에서 거사를 실행할 일본으로 떠나면서 김지섭 의사가 읊은 시-

 

한편, 문화재청에서는 2021년 11월 4일, 의열단원이던 김지섭 의사가 1924년 1월 5일 일본 도쿄 왕궁 입구 이중교에 수류탄 3발을 던지고 투옥된 후 옥중에서 동생과 부인에게 보낸 편지 4건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편지 3건에는 판결 언도일을 앞둔 상황에서도 의연한 태도, 투옥된 동지의 안부,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가족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다. 아내인 권석희에게 보낸 유일한 한글 편지에는 김지섭이 수감된 일본까지 면회를 오려는 아내를 만류하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김지섭 의사 형님인 김정섭 선생은 아우에 대해 “형경(荊卿)과 같은 담대한 남아가 이후에도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라고 하며 그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김지섭 의사는 1925년 5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7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이듬해 44세로 의문의 옥사로 순국하였다.  김지섭 의사는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이에 대한 실천 방략으로 의열투쟁을 선택한 독립투사로 그의 의거는 일제의 한인 동포 학살에 대한 민족적 응징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주범인 일왕의 권위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정부는 김지섭 의사에게 대통령장(1962)를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