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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민족 계몽을 꿈꾼 ‘대한민보(大韓民報)’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82]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대한제국(1897~1910) 시기는 근대의 희망과 아픔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침략적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우리나라로 침탈해 들어오는 외세를 막아내기 위해 무력투쟁(武力鬪爭)을 비롯한 여러 자강(自强)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을 각계각층에서 펼쳤으나, 끝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일제강점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근대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는 외세의 위협이 날로 늘어나는 때였기 때문에, 이때의 근대 문물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방편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문(新聞)’입니다. 그렇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였고, 그 후로 『한성주보(漢城週報, 1886~1888)』,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1899)』 등이 발행되었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 1898~1910)』, 『제국신문(帝國新聞, 1898~1910)』,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1910)』, 『대한민보(大韓民報, 1909~1910)』 등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신문들은 대부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침탈에 대응하기 위한 민족지 성격을 가지는 신문이었습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와 함께 대부분 폐간되지만, 그 이전인 통감부 시기(1906~1910)에도 많은 검열과 압박을 받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6년 말 대한민보를 기증받았습니다. 이 신문은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인 민족 신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신문의 발간을 주도한 단체는 당시 자강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대한협회(大韓協會)’이며, 사장은 대한협회 부회장이었던 오세창(吳世昌)이었습니다. 이 신문이 다른 신문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漫畫)가 매번 발간되는 호마다 실렸다는 점입니다. 이 삽화들은 당시 유명했던 청년화가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 그렸다고 합니다. 이 삽화도 역시 신문의 발간 취지에 맞게 사회비판적이거나 계몽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증받은 대한민보는 전체 1년여의 발간 기간(1909.6.2.~1910.8.22.) 가운데 말기에 해당합니다. 융희4년(1910) 5월 24일(화요일) 제281호부터 같은 해 7월 6일(수요일) 제316호까지 모두 36회차에 걸친 신문을 중간에 빠지는 부분이 거의 없이 연속적으로 수집하여 한 묶음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대한민보 묶음의 앞쪽과 뒤쪽, 아래의 부분 등이 훼손되거나 일부 떨어져 나갔지만,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합니다. 다만, 신문의 재질이 근대에 흔하게 쓰던 신문용지인 까닭에 열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어 보존처리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신문은 8면으로 구성되었던 289호를 제외하고는 매 호가 2매 4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면의 크기(가로×세로)는 전체 34×50㎝, 괘선 31.8×47.2㎝ 정도이고, 1면 가운데에 들어가는 삽화란의 크기는 8×13㎝입니다. 한 면은 7단으로 구성되었고, 이 안에 기사와 논설, 소설, 광고 등을 국한문 혼용으로 게재하고 있습니다.

 

손쉬운 계몽과 항일의 수단이 된 첫 만화

 

앞서 말했듯이 대한민보는 민족계몽 운동을 주도했던 대한협회가 주관하여 발간하였기 때문에 계몽과 항일적 성격의 내용이 많으며, 계몽과 항일의 수단으로 삽화를 골랐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한민보에도 호마다 삽화가 실려 있는데, 일례를 설명하겠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융희4년(1910) 5월 28일의 삽화입니다. 화면 왼편의 글을 보면, ‘이것 보게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니까 꿈적거리니 무엇이든지 건드릴 수 없어...’라고 해석이 되고, 화면 하단에는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밟으면서 무엇인가 지시하는 듯한 자세를 하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있습니다. 조선인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날은 통감부가 언론출판 탄압을 강화하기 위해 「출판규칙(통감부령20호)」을 공포한 날입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였던 시기, 신문의 그림으로나마 통감부의 탄압정책에 반발하였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언로(言路)를 억압한 검열의 흔적

 

대한민보는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검열을 당했으며, 그 흔적이 기증받은 대한민보에도 나와 있습니다. 검열당하여 삭제된 기사는 그 해당하는 부분의 활자를 뒤집어 찍어 글자마다 직사각형의 네모모양(소위 벽돌활자)을 하고 있거나(사진 아래), 원형의 활자(사진 위)로 대체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보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해가던 시기에 애국계몽 세력이 국민의 계몽으로 독립을 이루기 위해 발행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이 신문에는 계몽과 저항의 의지가 곳곳에 드러납니다. 1년여 남짓 되는 짧은 기간 발행되었던 신문이지만, 당시의 생활상과 의식, 계몽운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값ᅇᅥ치가 큽니다.

 

                                                                               국립중앙박물관(오춘영) 제공